슈가베이비 제안을 받다? 2화

by 우나

집주인의 독촉 문자에는 여전히 답을 못 하고 있었고, 친구들은 살던 나라로 떠났다. 영국으로 돌아간 남자친구는 이틀에 한 번꼴로 헤어지자고 했다. 왼쪽 발목은 아직도 부어 있었지만 병원엔 갈 수 없었다. 팬데믹으로 이민청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매일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봤다. 일주일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필요했던 건 사랑도 아니고 돈도 아니었다. 그냥 누군가와 말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었다.


네덜란드의 틴더는 나름대로 건전한 편이었다. 다니는 직장은 물론 가족사진까지 올려놓는 이들도 많았다. 찬 물에 불린 파스타와 찐 감자가 지겨워질 즈음, 나도 몇 번 그 어플을 켰고 나가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대부분 나처럼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했기에 큰 죄책감은 없었다. 그렇게 만난 친구들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가끔 진심으로 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서야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다고 사과했다.


이때쯤 되자, 한국에서 나의 삶이 전생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교수님들께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 다니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네덜란드에서의 난 월세는커녕 당장 밥 사 먹을 돈도 없었다.


그즈음 특이한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여든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는 인생이 텅 비었다며 친구가 되어줄 수 없겠냐고 했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그의 프로필에는, 젊은 남녀들과 웃으며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서야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되는지. 그는 자신도 젊었을 땐 힘들었다며,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온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뻔한 그 위로가 그때는 연륜이 있는 한마디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와 이야기하다 보니, 이상하리만치 나이 차이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원래 친구 사이에서 나이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가장 친했던 사람도 대학 시절 만난 교수님이었고, 우린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며 끝도 없이 수다를 떨곤 했다. 며칠 후, 그 노신사는 나만 괜찮다면 밥을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 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암스테르담은 웬만한 건물이 다 비슷하게 생겼다. 그와 만나기로 한 이탈리아 식당은 내가 입주 간병인으로 일했던, 전신마비 환자 P의 집 근처였다. 몇 번이나 지나쳤던 그 건물이 이렇게 고급 식당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혹시라도 그의 휠체어를 마주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그 노신사를 기다렸다.


메뉴판에는 비싼 음식들만 가득했다. 혹시라도 그가 오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 자리를 떠야 자연스러울지 고민했다. 돈을 내라고 할까 봐 물조차도 거절했다. 당시 난 식당들이 문을 여는지도 몰랐다. 밖에서 음식을 사 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가 나타났다. 잘 차려입은 양복에 중절모까지 쓴 차림새였다. 흔히 부자들을 떠올리면, 값비싼 명품이나 특정 물건 같은 것들이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윤기가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든살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선 나보다 건강해 보였다. 나는 그의 주문을 따라 뇨끼를 시켰다.


그와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몇 달 내내 싸구려 파스타를 간장에 비벼 먹던 내게, 따뜻한 뇨끼는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 그는 원하면 더 시켜줄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그는 우리가 채팅에서 이야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얘기를 많이 들어줬으며 젊음이란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는 조심스럽게 근처 자기 집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겠냐고 했다. 그의 말투에는 강요나 불순한 기색이 없었다. 왠지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미 친구처럼 느껴졌고, 나보다 수십 살은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편했다. 무엇보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혼자가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 첫 번째로 놀랐던 건, 박물관이라고 생각했던 건물이 그의 집이었다는 것이다. 고급 식당가가 모여있는 광장 바로 입구에 집이 있을 줄이야. 그는 5층 짜리 건물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그 건물은 내가 네덜란드에서 본 유일한 '지문 인식' 현관문을 가진 집이었다. (네덜란드는 오래된 건물이 대부분이거니와, 신식이라고 해도 열쇠를 사용한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나무문 같은 그 문은, 그가 지문을 찍자 옆으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매우 두꺼운 철문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마다 걸려 있는 커다란 샹들리에와, 번쩍이는 은빛 표범 동상 같은 것들이 보였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끈 건 엘리베이터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쯤은 당연하다는 듯 집 안을 보여줬다. 지하엔 사우나와 와인 저장고가 있었고, 거의 공원 수준으로 꾸며진 옥상에는 태닝용 선베드와 커다란 자쿠지 욕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집을 본 적이 없다.


특이한 건, 매층마다 침실과 거실, 식당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커다란 돌을 깎아 만든 식탁 위에는 과일과 꽃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벽지는 옛 그림에서나 보던 비단으로 된 것이었다. 나는 집이 얼마나 넓으면 이런 구조가 가능할까 생각했다.


다시 1층의 손님용 응접실로 내려오자, 가정부가 차를 내왔다. 중국에서 산 최고급 차라고 했다. 나는 허겁지겁 찻잔을 들이켰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한참을 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니?
지금 빈 층이 하나 있는데, 들어와서 살아도 돼.


집안일은 가정부가 다 해줄 테니, 난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쿨한 사람이라며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조건'은 단순했다. 이주일에 한 번씩 성병 검사를 받을 것, 여름마다 열여덟 살인 조카딸이 놀러 오니, 그녀 앞에서는 파출부처럼 행동해 줄 것.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그는 자랑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하는 정도에 따라 유학도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다고. 그가 최근에 유학을 보내준 여자애는, 지금 아소스 본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기침을 하느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지팡이를 쥔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난 어쩐지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먹은 뇨끼도 빠르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내가 모든 걸 털어놓은 탓에, 그는 내 이름이나 나이는 물론 다니던 대학교나 사는 동네까지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잘 나갈 수 있을까?




지금이라면 그냥 됐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땐,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우선이라고 믿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과 함께해야 한다든지, 내 ‘실력’이 어떤지 묻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커다란 아치형 창문 밖으로 몇 사람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찻물이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해 보니 부모님이 월세 문제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둘러댔다. 혹시라도 그가 그 사이를 파고들까 봐, 재빨리 내 가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엄청난 집을 칭찬하며, 나를 깎아내렸다. 다행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주제를 돌리기 위해, 그의 부의 비결이 궁금하다고 물었다.


그는 왜 그런 걸 묻느냐며, 지금껏 그런 질문을 한 여자애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치가 느껴졌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끈질기게 묻자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젊었을 때 물려받은 재산으로 회사를 하나 차렸고, 서른 무렵 그 회사를 투자사에 거액으로 넘겼다는 것이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럼 그는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일까? 그가 팔아넘긴 회사가 무엇인지 물어봤지만, 그는 끝내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도 알 만한 회사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아깝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하지만 통금이 시작되기 전에, 파스타를 사러 가야 했다. 저렴한 마트일수록 문을 일찍 닫는다. 나는 한껏 힘을 주어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러는 내내, 단 한 번도 옆이나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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