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모아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서너 달쯤 지났을 때였다. 작가로 일하던 성인용품 쇼핑몰이 문을 닫은 후, 나는 한인회사 계약직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아직 휴학생인데다, 네덜란드에 온 지 일 년이 채 안 됐다고 하니 다들 친절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주권 조건으로 일하던 직원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주말에도 상사들의 집에 불려가 집안일을 도왔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에 재떨이를 맞기도 했다. 그는 영주권을 받자마자 네덜란드를 떠났다.
암스테르담에서 코로나가 처음 발생한 건 겨울쯤이었다. 나는 도시 서쪽에 살고 있었고, 첫 감염자는 디먼이라는 외곽 지역에서 나왔다. 그때까진 그냥 아시아에서 잠깐 벌어진 소동 정도로 여겼다. 오히려 그걸 핑계 삼아, 더더욱 한국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코로나가 네덜란드를 덮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는 가장 먼저 나를 해고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안다. 난 계약직이었고 시민권은커녕 영주권도 없었으며, 나이도 제일 어렸다. 외국인인 나를 내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혼자 이해하고, 혼자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직장에서 잘린 첫 달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전 달에 일한 월급도 받았고, 오히려 늦잠을 잘 수 있어 좋았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네덜란드에서 일한 경력도 두세 개 생겼으니, 곧 다시 일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곧 식료품점을 제외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고, 저녁 이후에는 통행금지령까지 내려졌다.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는 비대면 수업으로 바뀌자마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몇 번이나 함께 가자고 했지만 난 정식 비자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기에 섣불리 네덜란드를 떠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갔고, 도시는 점점 비어갔다. 정말로 텅 빈 느낌이었다. 나는 매일 창가에 앉아 운하를 내다보았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가끔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결국 모아뒀던 돈이 다 떨어진 날이 왔다. 당시 내가 내던 월세는 1,275유로, 한화로 약 200만 원 정도였다. 네덜란드에 올 때 들고 왔던 500만 원은 이미 보증금으로 사라졌고, 한인회사에서는 최저 시급을 받았기에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지금이라면 방을 빼고 더 저렴한 곳으로 옮겼겠지만, 그땐 무조건 자리를 지키고 있다보면 언젠가 나아질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은 어디에서 왔던 걸까?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극한의 절약이 시작됐다. 가장 저렴한 마트까지 걸어가, 거기서도 가장 싼 파스타를 골랐다. 먼지 쌓인 파스타가 이리저리 쌓여 있었다. 이때 알게 된 건, 파스타는 불이 없어도 요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찬물에 파스타 면을 하루 정도 담가 두면, 마치 삶은 것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불린 파스타에 간장을 넣어 비벼 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과자를 한 봉지씩 샀다. 한 달이 지나자 그마저도 이주에 한 번으로 줄여야 했다.
나는 이전에 입주 간병인으로 일했던, 전신마비 환자 P에게 연락했다. 당당하게 그의 집을 떠났을 때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그는 백신을 맞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이민국은 문을 닫았고, 보험을 들 수도 없었다. 내가 백신을 맞을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 모든 이야기도 나의 동료였던 S가 대신 쳐주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이때쯤 난 발목 인대를 다쳤고, 마찬가지로 병원에 갈 수는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 게 끝나기 때문이었다. 당장 밥을 굶고, 얘기할 사람이 없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영국으로 돌아간 나의 남자친구는 무척 바쁘게 지냈다. 그는 헤어지자는 말을 일주일에 몇 번씩 하면서, 파티와 마리화나를 즐겼다.
그렇게 모든 연락이 끊기고 나서, 남은 건 세 달치 밀린 월세와 식은 파스타뿐이었다. 집주인에게 연락이 올까 봐 우편함을 보는 일조차 꺼려졌다.
그 무렵, 난 아주 이상한 제안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