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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걸린 슬픔: 이미지는 어떻게 영혼을 침식하는가

by 홍종민

어린 시절 당신의 방에 무엇이 걸려 있었는가.


이 질문이 그저 추억 여행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그 벽에 걸린 것이 당신의 무의식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기억하든 말든.

우리는 부모의 말, 부모의 행동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안다. 잔소리, 비난, 폭력. 이런 것들이 상처가 된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말이 없는 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미지는? 그냥 벽에 걸려서 매일 당신을 내려다보기만 했던 그림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모른다.


슬픈 눈의 소녀, 그리고 자살한 여동생


정신분석가 나지오는 로라라는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던 중 기이한 경험을 한다. 어느 날 건물 홀에서 우연히 울고 있는 로라와 마주쳤는데, 그는 로라가 우는 것을 본 게 아니었다. 얼굴과 동떨어진, 커다랗고 슬픈 두 눈만을 보았다(나지오, 2025: 91). 분석가가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담자의 무의식이 분석가에게 투사되고 있다는 뜻이다. 로라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가 나지오의 정신에 침투한 것이다. 말로 전달되지 않은 채로.

이 괴이한 경험이 치료의 실마리가 되었다. 나지오는 다음 상담에서 로라에게 어린 시절 인형들에 대해 물었다. 히스테리 환자의 무의식 형성에는 아동기의 인물들—인형, 장난감 동물, 만화 주인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로라는 특별한 존재를 떠올렸다. 인형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피카소 그림의 복사본. 커다랗고 슬픈 눈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가 손에 비둘기를 들고 있는 그림.

그런데 이 그림이 걸려 있던 장소가 문제다. 그림은 거실에 있지 않았다. 로라의 여동생 도라의 방에 있었다. 침대 맞은편 벽에. 도라는 매일 밤 그 슬픈 눈을 마주하며 잠들었다. 도라는 훗날 우울증에 걸렸다. 그리고 자살했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이 자녀에게 대물림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폭력을 행사하고, 잔소리를 들은 아이가 잔소리꾼이 된다. 이것은 '동일시'라고 불린다. 부모가 세상 그 자체인 시기에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고스란히 흡수한다. 스펀지처럼.

그런데 동일시만 있는 게 아니다. '투사'라는 것이 있다. 부모가 내면 깊숙이 억압해놓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감정들, 외부로 표현된 적도 없는 감정이 은밀하게 자녀에게 전달되는 방식이다. 말 한마디 없이. 행동 하나 없이.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이 있다. '투사적 동일시'다.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런 행동도, 언질도, 표현도 하지 않아도 한 사람의 감정이 그냥, 고스란히 주변에 전해지는 현상.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어서 학자들이 오래도록 언급하지 않았던 것. 멜라니 클라인과 비온이 이것을 언어화하고 이름을 붙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감정은 전염된다. 바이러스처럼.

그렇다면 이미지는 어떤가. 이미지도 감정을 전달한다. 아니, 전달하는 정도가 아니다. 이미지는 감정을 주입한다. 말없이. 지속적으로. 매일매일.

도라의 방 벽에 걸린 피카소 그림 속 소녀를 생각해보라. 그 소녀는 크고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도라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 눈과 마주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그 눈을 보았다. 수천 번, 수만 번. 그 슬픈 눈이 도라에게 무엇을 했을까.

로라의 어머니는 나중에 이 그림에 대해 흥미로운 말을 했다. 그 그림 속 여자아이가 평생 자녀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이다(나지오, 2025: 99).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그 그림이 아이들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그런데 어머니는 몰랐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지는 의식을 우회한다


아이의 정신은 미숙하다. 뇌생물학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강한 자극을 처리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불안한 엄마가 끊임없이 아기를 어루만질 때 생기는 자극조차 아이에게는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애정 어린 손길이 어떻게 해가 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른다.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자극의 강도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그 이미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본다. 반복해서 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가 아이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물이 스펀지에 스며들듯이. 슬픈 눈은 슬픔을 전달한다. 불안한 얼굴은 불안을 전달한다. 음울한 표정은 음울함을 전달한다. 말 한마디 없이.

나지오가 로라의 사례에서 발견한 것은 충격적이다. 세 겹으로 투명하게 겹쳐진 몽타주가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로라의 슬픈 눈, 여동생 도라의 슬픈 눈빛, 그리고 비둘기를 든 그림 속 여자아이의 슬픈 눈. 이 세 개의 눈이 서로 겹쳐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무의식의 작동 방식이다. 이미지는 연쇄한다.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불러오고, 그 이미지들이 겹쳐지면서 하나의 정서적 덩어리가 형성된다. 의식은 이 과정을 알지 못한다.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라는 그림 속 소녀의 슬픔을 흡수했다. 그 슬픔은 도라의 것이 아니었다. 그림 속 소녀의 것이었다. 그런데 매일 그 눈을 보면서 도라는 그 슬픔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그 슬픔이 도라를 우울증으로 이끌었다. 자살로 이끌었다.

프로이트는 트라우마에 대해 중요한 발견을 했다. 하나의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그 사건 자체 때문이 아니다. 사후적으로, 나중에 다른 사건과 연결되면서 트라우마가 된다. 이것을 '사후작용'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의식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을 초과하는 연상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도라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림 속 소녀의 슬픈 눈. 그것은 처음에는 그냥 그림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른 무언가와 연결되었다.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상실, 외로움, 두려움. 그것들이 그림 속 소녀의 슬픔과 연결되면서, 그 슬픔이 도라 자신의 슬픔이 되었다. 매일 밤 그 눈을 보면서 도라는 자신도 모르게 슬픔을 강화했다.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수년 동안. 그리고 어느 날, 그 슬픔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발랑티나라는 스페인 출신 보모다. 그녀는 로라와 도라를 어린 시절 내내 돌봐주었다. 그런데 이 보모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피카소 그림 속의 여자아이를 아이들과 경쟁시킨 것이다. 말을 안 들으면 그림 속 여자아이를 더 예뻐할 거라고 겁을 주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림 속 소녀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쟁자였다. 사랑받기 위해 이겨야 하는 존재. 그런데 그 존재는 실재하지 않았다. 그림 속에만 있었다. 이길 수 없는 경쟁.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 비둘기를 안은 그 여자아이는 로라와 도라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발랑티나에게도. 가족 전체가 이 그림 속 소녀의 지배 아래 놓인 것이다.


당신의 방에는 무엇이 걸려 있었는가


나는 이 사례를 읽으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방에는 무엇이 걸려 있었는가. 어쩌면 당신도 어린 시절 방에 걸린 무언가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슬픈 눈의 인형. 음울한 분위기의 그림. 불안한 표정의 사진. 그것들이 매일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그것들이 당신의 무의식에 스며들었다. 당신이 왜 특정한 감정에 취약한지, 왜 특정한 상황에서 불안해지는지, 왜 특정한 관계 패턴을 반복하는지—그 답이 어쩌면 당신의 어린 시절 방 벽에 있을 수 있다.

부모들은 아이 방을 꾸밀 때 무엇을 고려하는가. 예쁜지, 귀여운지, 교육적인지. 그런데 그 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는 고려하는가. 음울한 동화 속 장면. 슬픈 눈의 캐릭터. 외로워 보이는 동물. 이런 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아이 방에 걸어둔다. 아이가 매일 그것을 본다. 수천 번, 수만 번. 그리고 부모는 모른다. 그 이미지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지오는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한다. 오마르라는 21세 청년이다. 공포와 불안 속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며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연애도 못 하고 일도 못 했다. 나지오는 오마르의 불안이 어디서 왔는지 추적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오마르가 아기였을 때, 불안한 엄마의 품을 파고들었다. 엄마는 과보호하고 소유욕이 강했다. 아기를 끊임없이 안고 어루만졌다. 엄마의 불안이 아기에게 옮겨갔다. 말 한마디 없이. 그냥 품에 안겨 있는 것만으로.

나지오는 상담실에서 오마르의 어머니 역할을 하며 해석적 활유법을 사용했다. 불안한 엄마가 아기를 안을 때마다 그 불안이 아이에게 스며들었을 것이라고. 오마르가 겁에 질린 커다란 눈으로 엄마를 쳐다볼 때, 엄마는 이 아이도 나처럼 불안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라고(나지오, 2025: 117-118).

오마르의 불안은 오마르의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마르의 것이 되어버렸다.

감정은 이렇게 전달된다. 말없이. 행동 없이.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그림 속 소녀의 슬픔이 도라에게 전달되었다. 매일 밤 그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이것이 투사적 동일시의 힘이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랫동안 무시당했다. 그런데 임상 현장에서는 이것이 실재한다. 분석가들은 이것을 경험한다. 내담자의 감정이 자신에게 건너오는 것을.

당신이 느끼는 감정의 많은 부분이 실은 당신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문장이 불편하게 느껴지는가. 불편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뒤흔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슬픈 것은 내가 슬픈 일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내가 불안한 것은 내가 불안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닐 수 있다. 당신의 슬픔은 당신의 부모에게서 온 것일 수 있다. 당신의 불안은 어린 시절 방에 걸린 이미지에서 온 것일 수 있다. 당신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질적이라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낯선 사고나 욕망에 대해 책임을 회피한다. "그건 내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다. 우리가 '나'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들. 우리의 자기-이미지에 맞지 않아서 배척한 것들. 그것들이 우리를 움직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치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자신의 말에 대해,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의문을 던질 때 시작된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지?" "이 슬픔은 어디서 왔지?" 이 질문들이 시작될 때, 무의식의 문이 열린다.

도라는 이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이 슬픔은 어디서 왔지?"라고 묻지 못했다. 그냥 슬펐다. 그 슬픔이 자기 것이라고 믿었다. 그림 속 소녀의 눈에서 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만약 도라가 물었다면 어땠을까. "이 슬픔은 정말 내 것인가?" 만약 누군가가 도라에게 물어봤다면 어땠을까. "네 방에 뭐가 걸려 있니?"

로라는 치료를 통해 이 연결을 발견했다. 자신의 슬픈 눈과 여동생의 슬픈 눈빛과 그림 속 소녀의 슬픈 눈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무언가가 풀렸다. 로라는 상담을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프로방스로 가서 포도원을 가꾸기로 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무의식의 연결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나는 상담실에서 내담자들에게 자주 묻는다. 어린 시절 방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어떤 인형이 있었느냐고. 어떤 그림이 걸려 있었느냐고. 대부분은 처음에 의아해한다. 그게 왜 중요하냐고. 그런데 이야기를 시작하면 무언가가 떠오른다. 잊고 있었던 것들이.


어떤 여성은 어린 시절 방에 걸려 있던 발레리나 그림을 떠올렸다. 홀로 무대에 서 있는 발레리나. 외로워 보였다. 그녀는 평생 외로움에 시달렸다. 연결이 보이는가. 어떤 남성은 어린 시절 방에 있던 지구본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사준 것이었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넌 세상을 정복해야 해." 그 남성은 평생 무언가를 정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충분히 성공했는데도 만족하지 못했다. 연결이 보이는가.

이미지는 말없이 작동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말은 의식으로 들어온다. 처리할 수 있다. 반박할 수 있다. 거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지는 의식을 우회한다. 무의식으로 직행한다. 방어할 틈이 없다. 아이는 그 이미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른도 알지 못한다. 그냥 본다. 반복해서 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정서가 내면에 자리 잡는다. 저항 없이.

당신의 자녀 방에는 무엇이 걸려 있는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있는가. 그 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슬픈 눈의 캐릭터. 외로워 보이는 동물. 경쟁을 부추기는 이미지. 완벽함을 요구하는 이미지. 이런 것들이 매일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그것이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아이는 말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본다. 반복해서 본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의 일부가 된다.

도라의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그 그림이 아이들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 그림을 치우지 않았다. 왜일까. 어쩌면 어머니 자신도 그 그림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 슬픔이 어머니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물림은 이렇게 작동한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말없이. 인식 없이.


비둘기를 안은 그 여자아이는 평생 그 가족을 따라다녔다. 로라의 어머니 말대로.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끊지 않았다. 아무도 그 연결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내 어린 시절 방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어떤 이미지가 나를 내려다보았는가.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완전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무의식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질문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움직인다. 문이 조금 열린다.

로라의 치료가 끝날 무렵, 그녀는 깨달았다. 더 이상 과거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것이 치유다. 연결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림 속 소녀의 슬픈 눈은 여전히 어딘가에 걸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더 이상 로라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로라가 그 연결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아야 한다. 당신의 방에 무엇이 걸려 있었는지. 그것이 당신에게 무엇을 했는지. 당신이 느끼는 감정 중에서 어떤 것이 정말 당신의 것이고, 어떤 것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인지. 이것을 아는 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벽에 걸린 슬픔을 발견하라.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추적하라.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것인지 물어라. 당신의 슬픔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참고문헌

장 다비드 나지오/ 임말희 역(2025). 『다시 살아난 아기 클라라』. 눈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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