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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인 줄 알았다, 누군가에 대한 실망이었다

by 홍종민

당신이 지금 힘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일이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날 몰라줘서? 운이 없어서?

틀렸다.

당신이 힘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당신은 지금 '실망'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번아웃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요즘 힘들다고 하면 다들 "번아웃이네"라고 말한다. 과로, 스트레스, 업무량. 그럴싸한 설명이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가 우리가 정말로 직면해야 할 것을 가려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이 힘들어서'라는 설명 뒤에 숨는다. 진짜 아픈 곳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니까.

내가 상담실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일이 너무 많아요." "요즘 피곤해요." "뭘 해도 재미가 없어요." 그런데 조금만 더 들어가면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믿었던 동료에게 뒤통수 맞은 이야기. 오래 사귄 연인에게 갑자기 이별 통보받은 이야기. 부모님이 자기 편이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이야기.

그게 진짜 아픈 거다.

과로가 아니라 실망.

피로가 아니라 배신감.


나지오라는 정신분석가가 있다. 그는 수십 년간 우울증 환자들을 만나면서 한 가지를 발견했다. 우울한 사람들의 슬픔에는 '원망'이 서려 있다는 것. 그냥 슬픈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화를 표현하지 못한다. 표현하지 못한 분노가 어디로 가는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게 우울이다(나지오, 2025: 149).

이 통찰이 나를 때렸다.

우울한 사람은 화가 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 화를 밖으로 내지 못한다. 왜? 화낼 대상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의지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 화살을 돌린다. 자기에게로.

"다 내 탓이야." "내가 뭘 잘못했나봐." "난 왜 항상 이 모양이지."

이런 말들. 이게 분노가 뒤집어진 것이다. 우울은 분노의 가면을 쓴 것이다.


나는 혼외자로 태어났다. 엄마 손에 컸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내 인생에 없었다.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초등학교 6학년.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났다. 왕래가 시작됐다.

이게 더 복잡한 문제를 만들었다.

완전히 없는 아버지였다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없는 사람은 포기할 수 있으니까. 미워하고 끝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뒤늦게 나타난 아버지는 포기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열두 살 아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보라. 그 아이는 이미 나름의 세계를 구축해놓았다. 아버지 없이도 괜찮아. 엄마랑 둘이서 잘 살아. 나는 강해. 이렇게 믿으면서 버텼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게 흔들린다. 아버지가 없어서 괜찮았던 게 아니었다. 없다고 믿어야 해서 괜찮은 척한 거였다. 아버지가 나타나자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괜찮았으면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질문이 생긴다.

"왜 이제야?"

왜 이제야 나타났어? 그동안 어디 있었어? 나 없이도 잘 살았잖아. 내가 필요 없었잖아. 그런데 왜 지금?

이 질문에 답은 없다. 아버지가 뭐라고 설명해도 열두 살 아이의 상처는 설명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더 힘든 건 분노가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완전히 없는 아버지에게는 그냥 화내면 된다. 버린 놈. 나쁜 놈. 단순하다. 그런데 뒤늦게 나타나서 가끔 보는 아버지? 화내기도 애매하고, 받아들이기도 애매하다. 이 사람을 미워해야 하나, 좋아해야 하나. 이 사람이 내 아버지 맞나.

분노와 그리움이 뒤섞인다. 미움과 기대가 공존한다. 이 모순이 아이를 갈기갈기 찢는다.

결정적으로, 버림받을 거라는 공포가 더 강화된다. 왜? 한 번 없었던 사람이니까. 또 없어질 수 있으니까. 지금 만난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른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 그게 가장 무섭다.

젊었을 때 연애를 했다. 그때 나는 이상한 공포에 시달렸다. 헤어질 것 같다는 공포. 아무 이유 없이. 상대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도 불안했다. 언제 떠날까. 언제 버릴까. 그래서 먼저 확인했다. "너 나 사랑해?" "왜 연락 늦었어?" "어디 있었어?"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그거였다. 아버지가 완전히 없었던 게 아니라 '있다가 없었다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연인도 '있다가 없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더 생생했던 것이다. 나는 버림받을 사람이라는 믿음. 그게 무의식에 새겨져 있었다.

더 웃긴 건, 나는 그때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믿었다는 거다. 엄마 혼자서도 잘 키웠어. 아버지 없어도 괜찮아. 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어.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나지오가 만난 환자 중에 제라르라는 사람이 있다. 오십대 남자. 대기업 생산 담당 책임자.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급성 우울증으로 찾아왔다. 그는 자기가 왜 힘든지 알고 있다고 했다. "과로예요. 번아웃이에요."

나지오는 다르게 봤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제라르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 호주로 가서 새 가정을 꾸렸다. 그 뒤로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봤다. 청년기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했다.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이다. 또 다른 친구에게는 사기를 당했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처럼 따르던 상사에게 한직으로 전출 통보를 받았다.

네 번의 버림받음. 이건 우연이 아니다.

나지오는 제라르에게 결정적인 말을 건넸다. 그를 놀라게 하고, 그를 뒤집어놓고,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게 하는 말이었다.

"당신의 우울증은 과로 때문이 아닙니다. 실망 때문입니다."

무슨 실망인가. 나지오는 이렇게 설명했다. 제라르가 아버지처럼 사랑했던 그 이사가 그에게 전출을 예고했을 때, 그는 이 결정을 원통하게 여겼다. 그건 소중히 여기던 형에게 거부당한 것과 같은 원통함이었다(나지오, 2025: 159).

이 해석이 핵심이다.

상사가 그냥 상사가 아니었다.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형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전출 통보가 그냥 인사이동이 아니라 '버림받음'이 된 것이다. 세 살 때 떠난 아버지. 그 상처가 오십대가 되어서 상사의 얼굴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나지오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울한 한 남자 뒤에, 엄마에게 매우 의존하는 어린아이가 보입니다. 자신은 불행에 강하다고 믿지만, 지금 여기 배반당하고 방임된 한 어린아이가 보입니다."(나지오, 2025: 159).

이 말의 무게를 생각해보라.

오십대 남자다. 대기업 책임자다. 부하 직원들을 이끌고, 가정을 책임지고,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 안에 어린아이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엄마에게 의존하는 아이. 버림받고 방임된 아이. 그게 당신이라고.

보통 사람이라면 화를 냈을 것이다. "내가 어린애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제라르는 침묵했다. 감동 어린 침묵이었다고 한다.

왜 감동했을까.

자기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는데 인정하지 못했던 것. 누군가 대신 말해준 것이다. 네가 강한 척하는 거 안다. 네가 괜찮은 척하는 거 안다. 그 밑에 상처받은 아이가 있는 거 안다. 그걸 들은 것이다.


당신도 경험해봤을 것이다.

직장에서 상사한테 서운했던 적. 선배한테 무시당해서 밤새 잠 못 잤던 적. 동료가 나만 빼고 점심 먹으러 갔을 때 속상했던 적. 그게 왜 그렇게 아팠을까.

그냥 기분 나빠서?

아니다. 그 상사에게서, 그 선배에게서, 그 동료에게서 당신은 누군가를 봤다. 아버지를 봤을 수도 있고, 형을 봤을 수도 있고, 어릴 때 나를 외면했던 누군가를 봤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아팠던 것이다. 단순한 직장 내 관계가 아니었다. 오래된 상처가 그 관계에 투영된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오래 멈췄다.

나도 오십대 중반이다.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 세월 동안 "나는 강하다"는 믿음을 껍질처럼 두르고 살았다. 아버지 없이도 잘 컸어. 혼외자라는 꼬리표 달고도 여기까지 왔어.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그런데 그 껍질이 두꺼워질수록, 그 밑에 있는 아이는 더 외로워졌다.

열두 살에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 아이가 묻고 싶었던 게 있다. 왜 이제야 왔어? 나는 네 아들 아니었어? 그 질문을 한 번도 못 했다. 오십대가 된 지금까지.

나지오 말대로, 우울한 어른 뒤에는 어린아이가 있다. 강한 척하는 어른 뒤에는 두려운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외면할수록 어른은 더 무너진다.

오십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아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는 못 했다. 살아내느라 바빴다. 증명하느라 바빴다. 나는 괜찮다고, 나는 강하다고, 나는 버림받은 사람 아니라고. 그걸 증명하느라 정신없이 달렸다.

그러다 멈추니까 보였다. 달리는 동안 외면했던 것들이. 열두 살 아이가 거기 있었다. 여전히 그 질문을 안고. 왜 이제야? 왜 나를?


여기서 결정적인 통찰이 나온다.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약하지 않다고 믿는 약한 사람이다.

이 말이 처음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라. 어렸을 때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자신이 강하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괜찮아. 나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이 믿음이 그 아이를 버티게 한다.

문제는 이 믿음이 '착각'이라는 것이다. 착각은 유지되어야 한다. 어떻게 유지되는가. 누군가의 지지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이 착각이 유지된다. 그 사람이 있는 한 나는 강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떠나면?

풍선이 터지듯 모든 게 무너진다. 착각이 깨지는 것이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약했는지 직면하게 된다. 그게 우울증이다.

제라르에게 상사가 그런 존재였다. 그 상사가 있는 한 제라르는 강했다. 아버지처럼 따르는 사람, 형처럼 믿는 사람.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니까 나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버렸다. 한직으로 보내버렸다. 그 순간 모든 게 무너졌다.

번아웃이 아니다. 버림받음이다.


나지오의 말이 정확하다. "배우자가 나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면서 배우자를 사랑하면, 배우자에게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존재하지 않는 위험을 두려워하면 실제로 그 위험이 현실화된다."(나지오, 2025: 160).

두려움이 현실을 만든다. 이건 저주와 같다.

내가 연애할 때 겪은 게 정확히 이거였다. 떠날까봐 불안해서 집착했다. 집착하니까 상대가 숨막혀했다. 숨막혀하니까 떠나고 싶어졌다. 내가 두려워한 그 일이 내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있다가 없어지는 아버지. 그 경험이 이 패턴을 만들었다. 사람은 있다가 없어진다. 믿으면 버림받는다. 이게 내 무의식에 새겨진 공식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착각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강하지 않다. 나는 상처받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다. 이걸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다.

오십대가 넘으면 이 인정이 더 어려워진다. 수십 년을 버텨온 세월이 증거처럼 느껴지니까. 이만큼 살아냈잖아. 이만큼 견뎠잖아. 그게 강한 거 아니야?

아니다. 버틴 것과 강한 것은 다르다. 버틴 건 착각으로 버틴 거다. 진짜 강한 건 착각 없이 서는 거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그걸 안다. 젊었을 때는 몰랐다. 달리느라 바빠서.


둘째, 분노를 직면해야 한다. 우울 뒤에는 분노가 있다. 누구에게 화가 나 있는가. 나를 버린 아버지? 나를 이해하지 못한 엄마? 나를 배신한 연인? 나를 몰라주는 상사?

그 분노를 느껴야 한다. 회피하지 말고. 분노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분노는 신호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신호. 내가 원하는 게 있다는 신호. 그 신호를 읽어야 한다.

특히 '있다가 없는' 관계에서 생긴 분노는 더 복잡하다. 미워해야 할지 사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 그게 가장 독하다. 이 복잡한 분노를 단순화하지 말고 그대로 느껴야 한다. 미워하면서 그리운 거 맞다. 화나면서 기대하는 거 맞다. 그 모순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셋째, 지금 힘든 관계 뒤에 누가 있는지 봐야 한다. 제라르에게 상사는 상사가 아니었다. 아버지였고 형이었다. 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사람. 상사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기 때문에 힘든 건가? 아니면 그 사람 뒤에 다른 누군가가 보이는 건가?

그걸 알아야 한다. 그래야 엉뚱한 사람에게 화내지 않는다. 진짜 화낼 대상을 찾아야 한다.

넷째, 내 안의 어린아이를 인정해야 한다. 나지오가 제라르에게 한 말. "우울한 어른 뒤에 어린아이가 있다." 이 말을 자신에게 해야 한다.

오십대 어른 뒤에도 열두 살 아이가 있다. 세 살 아이가 있다. 아버지가 왜 떠났는지 묻고 싶은 아이. 왜 나를 두고 갔는지 따지고 싶은 아이. 그 아이가 여전히 거기 있다.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아이를 인정하는 것. 그게 치유의 시작이다. "너 거기 있었구나. 오래 기다렸구나. 이제 봤다."


나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인정하기까지.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만나기 시작했으니까.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하나. 가끔 보는 사람을 어떻게 원망하나.

그래서 그 감정을 묻었다. 아버지에게 화난 거 아니야. 그냥 관계가 어색할 뿐이야. 이렇게 합리화했다.

하지만 묻힌 감정은 썩지 않는다. 발효된다. 더 강해진다. 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었다. 왜 열두 살이 되어서야 나타났어? 그전에는 왜 없었어? 지금 만난다고 그 시간이 메워져? 한 달에 한 번 보는 게 아버지야?

오십대가 되어서야 이 분노를 인정했다. 수십 년이 걸렸다.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인정한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관계에서의 불안이 줄어들었다. 상대방이 떠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화내지 못한 그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연인에게 집착하고, 확인하고, 의심한 것. 상사에게 과하게 인정받으려 한 것. 친구에게 서운해하고 원망한 것. 그게 다 아버지에게 하지 못한 것이었다. 진짜 화낼 대상에게 화를 내니, 엉뚱한 데로 향하던 분노가 멈췄다.

이게 치유의 원리다. 진짜 아픈 곳을 건드려야 낫는다.


당신은 지금 왜 힘든가.

정말 일이 많아서인가. 정말 피곤해서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실망했는가. 누군가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가. 누군가 내 편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는가.

그 실망을 들여다보라. 그 배신감을 직면하라. 거기 분노가 있을 것이다. 그 분노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보라. 지금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사람 뒤에 진짜 누가 있는지 보라.

특히 당신 인생에 '있다가 없는' 사람이 있었는지 돌아보라. 완전히 떠난 사람이 아니라, 왔다갔다 하는 사람. 연락하다 말다 하는 부모. 관심 있는 척하다 없는 척하는 가족. 만나자고 해놓고 안 나타나는 친구. 사귀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연인.

이런 관계가 가장 사람을 미치게 한다. 포기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으니까. 그 사이에서 마음이 찢어진다.

당신 안에 어린아이가 있다.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두려운 아이.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은 상처받은 아이. 오십대든 육십대든 상관없다. 그 아이는 거기 있다. 나이 먹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 아이를 인정하라. 그 아이의 분노를 들어라. 그 아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대신 물어라.

강한 척하는 사람이 더 무너진다. 왜냐하면 착각이 깨질 때 추락의 높이가 더 높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약함을 인정한 사람은 무너질 곳이 없다. 이미 바닥이니까.

바닥에서 시작하는 것. 그게 진짜 시작이다.

나는 혼외자였고, 열두 살까지 아버지 없이 컸고, 그 뒤로는 '가끔 만나는 아버지'가 있었다. 이 애매함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젊었을 때는 몰랐다. 관계에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왜 그런지 몰랐다. 오십대가 되어서야 알았다. 열두 살 아이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는 걸.

그 아이를 인정한 지금, 나는 오히려 더 단단하다. 착각 위에 세운 건물이 아니라 진실 위에 세운 건물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강한 척을 내려놓는 순간, 진짜 강해지기 시작한다. 늦지 않았다. 오십대도, 육십대도, 몇 살이어도 늦지 않았다. 그 아이를 만나는 데 정해진 때는 없다.


참고문헌: 장 다비드 나지오/ 임말희 역(2025). 『다시 살아난 아기 클라라』. 눈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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