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해석의 기술: 정확함을 버려야 진짜가 온다

by 홍종민

정확한 해석은 없다

상담을 배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확한 해석'에 집착한다. 내담자의 말을 듣고 그 속에 숨은 진짜 의미를 '맞추려고' 한다. 마치 퀴즈를 푸는 것처럼. 정답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하고, 이론을 더 익히고, 사례를 더 분석한다. 언젠가는 내담자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이것은 착각이다. 완전한 착각.

정신분석에서 해석의 목표는 정확성이 아니다. '영향'이다. 내담자에게 어떤 충격을, 어떤 흔들림을, 어떤 균열을 일으키느냐가 중요하다.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다. 그게 팩트다.

수천 번의 상담을 해보면 알게 된다. 내가 '정확하다'고 확신한 해석이 내담자에게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대로, 내가 그냥 던진 한마디가 내담자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경우도 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맞았다'. 정확해서 맞은 게 아니다. '닿았기' 때문에 맞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맞다'와 '닿는다'는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맞는 것은 논리의 영역이다. 닿는 것은 존재의 영역이다. 상담에서 필요한 것은 후자다. 예외가 없다.


의도한 말 vs 실제로 한 말

상담실에서 내담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이 말은 내담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담자 스스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가 '의도한 말'을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도하지 않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말실수, 엉뚱한 표현, 갑자기 바뀌는 주제, 이상하게 반복되는 단어. 이것들이 진짜다. 의도한 말은 가짜다. 의도한 말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맞춰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맹정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의식하는 방식, 우리의 의식이 조명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초과하는 연상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1]


이 말을 곱씹어보라

.

의식이 조명할 수 있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

의식이 허락하지 않은 것

,

자기 이미지와 맞지 않는 것은 전부 배제된다

.

하지만 그것들이 연상의 논리를 통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

내담자가 "저는 어머니를 정말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그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물론 그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문장 뒤에 숨은 것, 그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 원망, 증오. 그것은 그의 자기 이미지와 맞지 않기 때문에 절대 의식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대신 이상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어머니가 요리를 하시면 저는 꼭 체하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상담자는 내담자가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말의 표면이 아니라 말의 결을 따라가야 한다. 어디서 막히는지, 어디서 빠르게 지나가는지, 어디서 목소리가 달라지는지. 이것이 무의식의 지문이다.


의미를 주지 마라

상담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내담자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다. "그건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요?", "어릴 때의 상처가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으신 것 같네요." 이런 해석들.

이것은 해석이 아니다. 암시다.

의미를 제공하면 내담자는 편해진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이랬구나." 이해가 된다. 설명이 된다. 명쾌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다. 상담자가 준 의미에 안착해버린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내담자는 스스로 도달한 생각만을 진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남이 준 의미는 빌려 입은 옷과 같다. 잠깐은 어울려 보이지만 결국 벗게 된다. 자기 것이 아니니까.

진짜 상담은 내담자를 '작업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하게 만들고, 의문을 품게 만들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 의미를 주면 이 과정이 단축된다.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막다른 골목이다.

내담자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물으면, 나는 되묻는다. "당신은 그게 무슨 뜻인 것 같아요?" 내담자가 "저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면, 나는 묻는다. "당신은 당신을 어떻게 보고 싶으세요?" 이게 답 피하기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다.

의미는 내담자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아니, 발견한다는 표현도 틀렸다. 의미는 발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어딘가에 정해져 있는 정답 같은 건 없다.


진리는 언제나 '다른 곳'에 있다

내담자가 어느 날 "이제 알겠어요!"라고 말한다. 눈이 반짝인다. 목소리에 확신이 묻어난다. "제가 왜 그랬는지 이제 완전히 이해했어요." 이 순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조심해야 한다.

물론 통찰의 순간은 귀하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진리'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함정에 빠진다. 오늘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느껴지는 깨달음이 다음 주에는 피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지금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것 같은 해석이 몇 달 뒤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은 내담자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의 속성이 그렇다.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진리는 움직인다. 진리는 언제나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 속에 있다.

상담실에서 내담자가 경험하는 '진리'는 묘한 시간성을 가진다. "이 말을 해야 해, 이게 정말 중요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올 때가 있다. 그런데 막상 말로 꺼내고 나면, 그 무게감이 사라져버린다. 이미 말해진 것은 공허해진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만이 뜨겁다.

그래서 상담은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통찰이 다른 통찰을 낳고, 그것이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낸다. 정답에 도달하는 여정이 아니라, 질문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좋은 상담은 내담자에게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내담자는 5년간의 상담 끝에 이렇게 말했다. "처음 왔을 때보다 제가 더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편해요." 이게 상담이다. 확실성을 버리고 불확실성과 친해지는 과정. 답을 움켜쥐려는 손을 놓고, 물음 속에 머무르는 연습.


말의 겹을 읽어라

말에는 겹이 있다. 하나의 문장이 여러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맹정현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사건은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2]


말도 마찬가지다

.

하나의 말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

.

다른 말들과의 관계 속에서

,

다른 시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결정된다

.

내담자가 "아버지가 제 뒤에 있어요"라고 말한다고 하자. 이 문장에는 최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아버지가 나를 지지해준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버지가 내 뒤에 서서 감시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가 맞을까? 둘 다 맞다. 아니, 둘 다 '맞을 수 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중요한 것은 왜 하필 그 표현을 썼느냐다. "아버지가 저를 응원해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저를 도와줘요"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뒤에 있다"고 했을까? 그 단어의 선택 자체가 무의식의 지문이다.

나는 상담에서 내담자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 특히 반복되는 단어,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갑자기 튀어나오는 단어. 이것들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한 내담자가 남편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전쟁" 같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전쟁이요?" 그녀는 당황했다. 자기도 왜 그런 단어를 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6·25 참전용사였다는 것. 아버지가 평생 '전쟁'처럼 살았다는 것. 그녀도 모르게 그 단어가 나온 것이다. 남편과의 갈등 뒤에 아버지와의 미해결된 관계가 있었다.

이것이 다의성의 힘이다.

하나의 단어가 여러 층위의 경험을 동시에 담고 있다. 상담자가 그 층위를 읽어내면, 내담자는 자기도 몰랐던 자기를 만나게 된다.


짧게, 날카롭게

좋은 해석은 짧다. 예외가 없다.

장황한 해석은 힘이 없다. 이것저것 다 설명하려고 하면 오히려 흐려진다. 핵심이 묻힌다. 내담자는 혼란스러워진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모른다.

간결함은 재치의 핵심이라고 했다. 상담에서도 마찬가지다. 날카로운 한마디가 장황한 설명보다 낫다. "전쟁이요?"처럼. "뒤에요?"처럼. 내담자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기만 해도 된다. 다만 어떤 부분을, 어떤 톤으로 되돌려주느냐가 관건이다.

상담자가 길게 말하면 내담자는 수동적이 된다. 듣기만 하게 된다. 상담자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그러면 이미 에너지가 빠진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다.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짧게 던지고, 기다려라. 침묵을 두려워하지 마라. 침묵 속에서 내담자가 일하도록 두어라. 상담자가 말을 많이 하면 내담자는 일을 안 한다. 상담자가 침묵하면 내담자는 일하기 시작한다. 이게 상담의 역학이다.

한 경력 상담자가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좋은 해석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했다. "말을 줄이세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의 절반만 하세요. 그것도 많으면 다시 절반으로 줄이세요."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뭐가 남죠?" 내가 답했다. "그게 핵심이에요."


놀라움의 힘

예측 가능한 해석은 힘이 없다. 내담자가 "아, 그러시겠지"라고 예상할 수 있는 말은 충격을 주지 못한다. 충격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좋은 해석은 놀라움을 동반한다. 내담자가 "어?" 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예상을 빗나가야 한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뒤집어야 한다.

이것은 충격을 위한 충격이 아니다. 무의식은 놀라움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측 가능한 것은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예측 불가능한 것이 무의식을 건드린다.

어떤 내담자가 늘 "저는 강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의 모든 이야기는 그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물었다. "강하면 뭐가 좋아요?" 그는 당황했다.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강함은 당연히 좋은 것이니까. 그런데 왜 좋은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질문 하나가 그의 전제 전체를 흔들었다.

세션의 말미에만 해석을 한다거나, 늘 같은 주제만 짚는다거나,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 움직이면 내담자는 적응해버린다. 방어가 준비된다. 상담자의 말이 더 이상 닿지 않게 된다.

타이밍을 달리하라. 주제를 옮겨라. 내담자가 방심할 때 던져라. 그래야 빗장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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