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반도주를 하다

by 슬로우

야반도주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우리 집에서 말이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안되는데, 동네 사람들과 교회 사람들은 빚 갚으라고 난리를 치니 견딜 방법이 없어서 밤에 몰래 필요한 옷가지만 몇 벌 챙겨서 서울로 도망 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는 지인의 배려로 신림동 지하 단칸방에서 당분간 지낼 수 있다며 고향집에는 이제 가지 말고 서울로 오라며 주소를 알려주었다.


난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


야간도주한 것도 충격이었고, 남의 돈을 그렇게 떼먹은 것도 충격이었고, 나의 인생이 부모님 때문에 망가지는 것도 충격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수집을 좋아해서 고향집 내 방에는 약 400권 정도의 책이 있었다. 그 책들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면서 틈틈이 돈을 모아서 한 권 한 권 수집한 나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또한, 어릴 적부터 모은 우표집 3권이 있었으며, 내 어릴 적 추억과 친구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앨범이 두 권 있었다.


이 모든 나의 추억과 소중한 물건들이 이제는 사라진 것이다. 다시는 고향집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야반도주를 할 거면 최소한 내 소중한 물건을 챙길 수 있게 나에게 시간을 하루라도 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 떼인 분들에게는 너무 죄송스럽고 안타까웠지만, 내가 빌린 돈도 아닌데, 부모님 때문에 내 평생의 추억들까지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니 너무 열이 받았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나의 어릴 적 사진이 하나도 없다. 부모님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없애버렸다.




서울에 도망온 후에도 가끔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안방에 앉아서 돈 받을 때까지 안 나가겠다고 버티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학교 앞 고시원에서 잠을 청하거나 술을 마시고 친구 자취방에서 자는 날들이 많아졌다.


난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너무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와는 별개로, 아버지가 그분들의 빚을 갚으셨는지 갚지 않으셨는지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든다. 돈의 액수가 크지 않다면 내가 알바를 해서라도 갚겠지만, 알바로 갚을 수 있는 수준의 돈은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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