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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하나로 시작하는 취미, 화석탐사

by 팔레오


세상에 취미는 넘쳐납니다.


독서나 영화 감상처럼 몸만 있으면 되는 것들도 있지만, 대개는 취미를 시작하려면 '장비빨'이 필수입니다. 골프채를 질러야 필드에 나가고, 자전거를 사야 라이딩을 시작하지요. 게다가 한번 발 들이면 끝도 없이 좋은 장비에 눈독 들이느라 지갑은 늘 텅텅 비기 일쑤입니다. 저도 한 때 DSLR사진에 흠뻑 취해 빠져든 적이 있었는데 끝없는 고오급 렌즈 뽐뿌를 못 이기고 천만 원 가까이 비용을 써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여기, 당신의 지갑을 지켜줄 혜자스럽고 멋진 취미가 있습니다. 바로 화석 탐사죠. 이 취미를 갖기 위해서는 딱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망치 하나! 그렇습니다, 고작 망치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입문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화석이 나온다고요?"


보통 화석은 외국에서나 발견되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나름 '화석 대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죠. 책이나 박물관이 아닌 가까운 자연에서 직접 화석을 찾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Estwing 지질 망치 (20온스)


제가 처음 화석 탐사에 입문할 때, 4만 원짜리 Estwing 지질 망치 하나를 샀습니다. 그게 취미를 위한 준비 끝이었죠. 아니, 이게 말이 돼? 싶겠지만, 정말 그 후로 추가로 들인 돈이 10원도 없습니다. 심지어 10년 넘게 동고동락한 제 망치는 처음 샀을 때랑 비교하면 녹만 살짝 슬었을 뿐 기능은 새것과 다름없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토르의 묠니르처럼 '불멸의 망치'라 불러야 할 수준입니다.


이 지질 망치,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고생물학자나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끝판왕 '망치계의 에르메스'로 통하죠. 단돈 4만 원만 투자하면 취미 활동 시작은 물론, 추가 지출 걱정 없이 평생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화석 산지까지 가는 기름 값은 제외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그건 뭐, 다른 취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마존에서 이 망치를 주문하고 배송받기까지 10여 일 동안 안달이 났었습니다. 오죽하면 매일 밤 필드에 나가는 꿈을 꿨을까요? 꿈속에서, 저는 세상에 없던 엄청난 화석들을 줄줄이 발견하며 학계를 뒤흔들 정도로 대단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태백의 삼엽충 화석


그리고 마침내 이 망치가 내 손에 쥐어지던 그날부터 제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돌덩이인 줄 알았던 암석 속에서 수억 년 전에 살았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마치 전설 속 보물을 찾는 여정과도 같았습니다.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과거에 살았던 작은 삼엽충이나 나뭇잎 화석이라도 발견하는 순간의 경이로움과 감동은 어쭙잖은 말이나 글로써 이루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


특히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에서 벗어나 오직 고즈넉한 자연 속에서 까마득한 과거와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파민이 폭발했습니다. 결국 이 작은 망치 하나가 나에게 예상치 못한 신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준 셈이었죠.



포항의 나뭇잎 화석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굳이 Estwing 망치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집에 굴러다니는 작은 망치 하나만 있어도, 어딘가에서 억겁의 세월을 버티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억 년 전 시간의 흔적을 내 손으로 직접 찾아내는 경이로움,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잊고 살았던 순수한 열정을 되찾는 경험. 이 모든 것들을 작은 망치 하나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 화석탐사를 떠날 준비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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