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벼락의 맛
지난회 겨울 산행기에 이어 이번에는 이른 봄 산행기입니다.
이번에도 건강증진을 위한 등산, 자연과 함께하는 힐링, 선조들의 흔적탐방 등의 그럴싸한 이유를 들며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팩트폭행'을 하자면, 길에 떨어진 돈 줍자는 것이 주목적임을 수줍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왕래가 많았던 옛길을 따라 걷습니다.
아직 잡풀이나 나뭇잎이 자라지 않은 탁 트인 숲길을 걸으면서, 이 시기가 탐사하기 가장 좋을 때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지나면 녹음이 우거져 다니기도 불편해지는 데다 뱀, 모기, 진드기, 더위를 피할 수 없죠. 작년에도 겪었지만 올해도 또 겪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아찔해집니다.
오늘의 마수는 작은 말방울입니다. 신호가 잡힌 곳의 솔잎을 살짝 들추자 귀엽고 작은 방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금이야 골목골목까지 도로가 많이 발달해 있지만 조선시대엔 도로라고 내세울 만한 게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도로를 크게 내면 외적이 침입할 때 유리할 수도 있다고 일부러 도로를 내지 않았다고 하죠. 때문에 이웃 일본이나 청나라에 비해 상공업 발달이 매우 미미했습니다.
관측 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외적의 존재를 미리 생각하신, 조상님들의 시대를 앞선 탁월한 과학 정신에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존재와 관측이 혼재하는 조선판 '슈뢰딩거의 고양이'네요.
아무튼 그 시절은 좁은 산길이 곧 도로였죠. 따라서 사람뿐만 아니라 짐을 실은 말과 나귀도 고개를 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과 나귀에 달려있던 방울이 떨어져 이처럼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죠. 어떤 이들은 이를 무당 방울이라 생각하고 불길한 물건 취급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엽전 10개보다 더 가치 있는 귀하고 멋진 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갯길 근처에 다다르자 드디어 엽전이 등장합니다.
옛 주인과 산행을 하다가 호주머니에서 흘러나와 뜻하지 않은 이별을 겪은 후, 몇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가운 바닥에서 긴 잠을 자고 있다가 이제 깨어났네요.
이제 새 주인을 만나 따뜻한 호주머니 속으로 쏘옥~ 들어갑니다.
친구가 따뜻한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한 것인지 바로 옆에 있던 녀석이 외치네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too"
"我也想一起去!(Wǒ yě xiǎng yì qǐ qù.)"
??? 뭔 소리인가 했더니 물 건너온 청나라 건륭통보 친구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하는 소리였네요.
저는 국적 불문 모든 엽전을 받아주는 관대한 사람입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아무렴 얼마든지 데려갈 수 있지. 혹시 주변에 비슷한 친구들 더 없니?"
여기저기서 엽전 친구들이 제발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예전에 조상님들이 이 근처에서 투전이라도 하고 노셨는지 엽전 행렬이 끝이 없네요. 그런데 저 위에 누워있는 탐지기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혹시 눈치채셨는지?
그러고 보니 이번에 봄맞이 이벤트로 새로 영입한 탐지기를 소개하지 않았네요.
Minelab社와 Daiso社가 함께해 탄생한 환상의 콜라보 <Equinox800 'Ssaguryeo' Limited Edition>입니다. 미려하게 주름진 곡선의 샤워 커버가 코일을 감쌌으며, 특히 전신을 두르고 있는 은색의 고오급 수도관 커버와 비닐봉지가 압권이라 그야말로 간지폭발입니다.(라고 우기지만 사실 겁나 부끄러움)
탐지기를 이리저리 스윙하다 보면 돌이나 나무에 부딪쳐 충격을 받을 수도 있는데, 장기간 충격이 누적되면 코일에 손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잡음이 심해져 탐지에 지장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코일에 이와 같이 완충 스펀지를 부착하고 틈 사이에 이물질이 끼는 걸 방지하지 위해 샤워 커버를 씌웠습니다. 샤워 커버를 만든 사람은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부끄럽다 한들 어차피 아무도 없는 산에서 혼자 사용할 거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새로 산 탐지기는 소중하니까요.
오전 전반전 결과물을 물로 살짝 씻어내고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참 예쁩니다. 서낭당 돌무더기도 아닌 곳에서 나온 결과물 치고는 매우 준수합니다.
전반전 종료 후 점심을 먹습니다. 오늘 메뉴 역시 찬물 부어 뜨겁게 먹는 즉석밥입니다. 이것은 혁명, 한 동안 이런 신문물이 있다는 걸 모르고 과자 부스러기나 삼각김밥 따위로 부실하게 점심을 때웠던 나날이 통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쫄깃쫄깃한 라면과 함께 뜨거운 국물을 호로록 흡입하자, 고지대의 칼바람을 맞아 얼어붙었던 몸이 이내 사르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입니다.
"아~ 좋다."
전반전 성과가 기대 이상으로 좋아서 만족함을 알고 따뜻한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만,
*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욕심 많은 존재
* 나는 인간이다.
* 고로 나는 만족을 모르는 욕심 많은 존재
라고 어설픈 삼단논법의 논리를 핑계로 다음 점찍어 둔 장소로 향합니다.
산 넘고 물 건너... 옛길을 따라 30분가량 산행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길에서는 아무 쓰레기도 탐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만큼 현대인의 왕래가 거의 없었던 청정 옛길이라는 의미겠지요.
고개 끝에 다다르자 흔적만 남은 엉성한 돌무더기를 만났습니다. 혹시나 하고 탐지기를 들이대보니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신호음이 잡힙니다.
'쓰레기겠지, 설마 이게 다 엽전일까?'
"응 아니야"
엽전 맞네요.^^
신호가 잡힌 곳의 돌을 한 두 개만 들추면 엽전이 나타납니다. 오래전 이 고개를 지나가던 나그네들이 안녕을 기원하며 동전을 묻어두고는 그 위에 돌을 살포시 얹어두었나 봅니다.
당이전 천자문전도 나오고,
대한제국 근대전도 나옵니다.
처음엔 흙이 많이 묻어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흔한 대한제국 반전(1전의 1/2)이 아니라 순종 때 잠깐 발행한 소형 반전이었습니다. 나름 희소성이 있어 화폐도감에 나온 가격으로 10만 원이 넘는 귀하신 몸이었네요.
엽전이 떼거지로 나오는 관계로 적당히 모았다가 단체샷을 찍습니다.
먼저 개나리반~
두 번째 민들레반~
꽃잎반 친구들 모이세요~
진달래반 친구들도 모이시고~
풀잎반 친구들도 이리 오세요~
더 이상 탐지음이 들리지 않게 되자 흙과 낙엽을 덮어 뒷정리를 합니다. 금속탐지 매너 중 하나가 자신이 판 땅을 반드시 원상복구한다는 것인데 이를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어찌 보면 멧돼지도 땅을 마구 파헤지는 산인데 별거 아닐 수 있다 생각할 수 있지만, 탐지를 다니면서 그런 흔적들을 보면 조금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멧돼지같은 짐승이 아니라 매너를 아는 사람이니까요.
영화 킹스맨의 명대사가 떠오릅니다.
"매너가(철컥~) 사람을(철컥~) 만든다(퍽~)."
후반전에만 수확한 전리품들입니다. 조상님들이 저에게 주려고 남긴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래도 늘 동전을 만나게 해 준 조상님들께 허공에 대고 감사인사를 합니다. 오늘은 인사 정도가 아니라 큰 절이라도 해야 할 듯합니다.
세어보니 엽전만 52개네요. 게다가 전반전 엽전 23개까지 있으니 오늘 하루에만 무려 75개나 되는 엽전이 품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야말로 엽전 대박의 날입니다.
아무리 만족을 모르는 욕심 많은 존재라 해도 오늘만큼은 만족입니다.^^
하산하는 길,
이른 봄이지만 얼음처럼 차갑고 깨끗한 계곡물에 손과 마음을 씻으며, 오전과는 사뭇 다른 '언팩트폭행'을 합니다.
'난 돈이나 주우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연과 함께하며 힐링하려는데 어쩌다 보니 엽전이 보여 그냥 주웠을 뿐인 거야.'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