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비밀
놀이터에서 이제 산으로 갈 차례가 되었습니다.
제 옆에 딱 붙어 함께 산으로 떠나 봅시다.
참고로 더위를 잊기 위한 겨울 산행기입니다.
추위가 여전하네요.
이 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산으로 금속탐지를 떠난다는 건,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입니다.
이불 밖은 위험해
그러나 오랫동안 이불속에서 뒹굴거리다 보니 결국 늘어나는 건 잠이요, 뱃살이라~
이불 속도 위험해
어느 쪽이든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생각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금속탐지기를 주섬주섬 챙기고는 산으로 출발합니다.
너무 이른 아침, 뼛속 깊이 스미는 맹추위에 머리까지 띵해집니다. 그래도 답답한 방구석 이불속에서 빠져나와 오랜만에 산길을 걸으니 기분은 좋습니다.
역시 나오길 잘했어
산을 오르다 보니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한채 보여 마당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집 한편에 빈 술병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네요. 집주인이 대단한 애주가였던 듯합니다.
오래된 금복주 병입니다. 가끔 금속탐지 허탕을 치고 빈손으로 올 때 그나마 옛날 술병이라도 한 두 개 주으면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만, 이런 것들은 대개 집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기 십상입니다. 빈병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오래된 병들이 상태나 희소성에 따라 만 원에서 수십 만 원 사이에서 거래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고 오기엔 좀 아쉽고, 그렇다고 가져오자니 집이 지저분해지고...
딜레마네요
오늘의 마수걸이는 6.25 전쟁 때 사용된 실탄입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낙엽이 쌓인 곳은 다행스럽게도 땅이 꽁꽁 얼지 않았습니다. 근데 자세히 보니 M1개런드탄이 아니라 일본군 아리사카탄이네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이 사용했던 소총인 아리사카를 6.25 전쟁 때 무기가 부족해 국군이나 학도병들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금속탐지에서 아리사카탄이 나옵니다. M1개런드탄과 아리사카탄을 비교해 보면 크기와 비율이 조금 다릅니다. 금속탐지를 자주 하다 보면 자연스레 군용 장비에 대해서도 빠싹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한자리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총알이나 탄피 등 군용 장구들은 훗날 유해발굴 단서로 활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 자리에 다시 묻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파편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포탄의 일부로 추정됩니다.
60mm 박격포탄의 날개 부분입니다. 폭약이 들어있는 몸체는 없기 때문에 폭발 위험은 없습니다만, 곡괭이로 생각 없이 팍팍 내리찍다가 갑자기 이런 게 튀어나오면 정말 염통이 쫄깃~해집니다.
미군 야상 단추입니다. 엽전만큼 큼직한 데다 독수리 도안이 멋져서 많은 금속탐지인이 찾고 싶어 하는 품목 중 하나죠. 부드러운 칫솔로 살살 문질러주면 늠름한 자태의 독수리가 모습을 드러낼 듯합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밑동이 썩어서 쓰러진 나무 전신주가 보입니다.
'체'는 체신부를 뜻하는 것 같고 1971은 제조년도 혹은 전신주 번호인 듯합니다.
체신부는 1981년까지 존속한 기관으로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죠. 양철판 위에 숫자를 붓으로 직접 쓴 것이 아날로그 시대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과거 치열한 격전지였는지 탄피와 파편 등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장소를 조금 옮겨 보았습니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간 송담 덩굴이 제법 굵직합니다. 몸에 좋은 것이면 뭐든 드시는 분들은 이를 잘라서 약재로 쓰거나 담금주용으로 쓴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것이 아직은 필요없는 사람이므로 "우리 서로 못 본 걸로 하자"고 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 보니 무덤이 꽤 많았는데, 봉분의 흔적만 겨우 남은 곳에 부러진 비석이 보입니다. 어쩌다가 단단한 비석이 부러졌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글씨가 희미해서 다 알아볼 수 없었지만, 대략 조선시대 군 관련 벼슬에 올랐던 강원도 평창이 본관인 사람의 무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나라를 지키셨던 분일 텐데 이렇게 잊혀져버리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금속탐지 신호음이 또렷하지 않아 팔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파보았더니 푸르뎅뎅한 것이 보입니다. 푸르뎅뎅하다는 것은 오래되어 녹청이 생긴 구리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철보다는 구리로 된 것들이 더 좋은 물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꺼내보니 고려시대 숟가락이네요. 아깝게도 부식되어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나왔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조선시대 놋숟가락과 달리 고려시대 숟가락은 좀 더 길쭉하게 생겼고, 끝부분이 보통 제비꼬리처럼 두 개로 갈라져 있거나 연꽃모양이 달려 있습니다.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숟가락이 나온 곳 바로 옆에서 쩌렁쩌렁한 신호음이 잡혔습니다. 큰 기대감을 갖고 한번 파보았습니다.
티스푼???
뒷부분에 동그란 약수저가 달린 고려시대 수저인데 또 부식되어 나왔습니다. 아깝...
티스푼같이 생긴 게 약수저 부분이었네요.
바로 옆자리에서 생뚱맞게 나온 일제시대 알루미늄 동전입니다. 여기는 고려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시공을 초월한 곳이네요. 아마도 옛 주인이 이곳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주머니에서 쪼로록 흘러나왔던 모양입니다. 그 시절 일본동전의 잔존량이 워낙 많아 지금은 별 가치가 없지만, 수십 전이 넘는 돈을 한방에 흘린 사람은 당시에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지...
근데 기왕 잃어버리실 거면 엽전이나 대한제국 근대전 같은 좀 더 좋은 동전으로 흘려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 근처엔 엽전을 흘리신 분도 있었네요.
그러나 푸욱~삭아서 뒷면을 보니 만주어가 쓰여 있어 청나라에서 건너온 돈이라는 것만 겨우 알아볼 정도입니다. 아마도 흔한 건륭통보나 도광통보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금속탐지를 하다 보면 중국 엽전이 꽤 자주 나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청나라에서 많은 동전을 들여와 통용시켰기 때문인데요. 상평통보와 1:1로 교환되었으며 크기가 작아 조정에서는 새로 돈을 찍어내는 것보다 개이득인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당백전과 더불어 조선 화폐경제를 어지럽히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바로 옆에서 구멍이 송송 뚫린 신기한 상평통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구멍이 12개라...
구멍이 뚫린 엽전이 이따금씩 나오긴 하는데 이렇게 많이 뚫린 경우는 처음 봅니다. 대체 누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많은 구멍을 냈을까를 상상하다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12개의 구멍과 본래의 사각 구멍까지 합치면 모두 13개(불길한 숫자!)
게다가 네모난 4각의 구멍(죽음의 死!)
갑자기 오싹해집니다.~
깊은 산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오싹해지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오싹해진 마음을 진정시키며 걷고 있던 중 우연히 뭔가를 발견합니다. 마치 비석처럼 반듯한 돌이 땅속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네요.
낙엽을 살짝 걷어보니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작은 굴이 나타났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급호기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돌아래 보이는 굴의 위치가 너무 낮아 땅바닥에 얼굴을 대야만 겨우 보일 듯합니다.
낙엽과 흙을 좀 더 치우고 안을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이제 준비는 끝났습니다. 옆으로 머리를 기울여 안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됩니다. 숨 막히는 순간, 정적이 흐르고 심박수가 분당 100회를 넘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럼 어디 한 번 볼까?"
잠깐!!! 동작 그만!!!
호기심과 기대감이 앞서 잠시 가려졌던 두려움이 갑자기 엄습해, 3초간 스턴 상태로 있다가 뭔가를 깨닫고는 스르르 뒤로 물러났습니다.
굴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보물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맹수가 튀어나온다면???
유골이 가득하다면???
귀신하고 눈이라도 딱 마주치면 어쩔???
그래서...먼저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밀어 살펴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 2편에 계속 ------------
...하려다가 성질 급하신 분들이 있으실 듯해 바로 시작합니다. ㅎㅎㅎ
사진으로 찍어보니 어두워서 확실치는 않지만 벽돌처럼 인위적으로 돌을 쌓아 올린 것이 보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걱정했던 무서운 애들은 일단 없는 것 같습니다.
무서운 애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좀 더 대담하게 팔을 쑤욱~넣어 제대로 찍어봅니다. 끝에도 벽돌처럼 돌이 쌓여있습니다. 좌우 폭은 약 60~70cm 가량이고 길이는 그보다 몇 배는 더 길어 보였습니다. 돌을 쌓아 길쭉한 형태로 방을 만든 모양새로 보아 틀림없는 무덤인 듯합니다.
줌 인~
그러나 입구 쪽에 두툼하게 쌓인 흙이 시야를 가려 끝 쪽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네요. 어쩌면 유물이나 유골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아닐지?
전체적인 모양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도 이런 형태의 무덤일 듯합니다. 바로 5~6세기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수혈식 석곽분)입니다.
오래전부터 인디애나존스처럼 오래된 무덤과 같은 유적이나 보물을 찾는 게 작은 소원 중 하나였는데 소박하지만 오늘 그 소원이 이루어졌네요. 무려 1500년이나 된 신라시대 무덤을 직접 발견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사실 금속탐지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같은 생각일 줄로 압니다. 자신이 꿈꿔왔던 보물들을 찾아내는 모험가가 되는 것, 남들이 하지 못한 일에 도전해 소원을 이루는 것, 세상의 모든 모험가와 도전가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무덤 주위를 살펴보니 토기 파편이 더러 보입니다.
물결 문양이 있는 토기편도 보입니다.
격자 문양의 토기편도 있네요.
이런 것들이 정말 신라시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박물관 자료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박물관에 있는 신라 토기입니다. '대부장경호'라고 하죠.
물결 문양과 줄 패턴이 아주 흡사합니다. 대부장경호를 비롯해 신라 토기에서 가장 빈번하게 보이는 문양이 바로 이런 문양이라고 하죠.
이 역시 세로줄과 가로줄, 격자문양 등 비슷한 패턴이 보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토기편은 신라 시대 것이 맞는 것 같고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덤 입구가 저절로 열릴리는 없으니 아마도 오래전에 누군가가 열고 유물을 가져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부근은 2004년 경북 문화재 연구원에서 확인한 신라고분군이라고 합니다. 문화재 보호구역은 아니며 아직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덤 입구는 원래대로 흙과 낙엽을 다시 덮어서 흔적을 지운 다음 나만의 비밀 하나를 간직한 채 하산합니다.
오전 탐사는 이렇게 끝났고, 금속탐지의 영원한 마스코트인 엽전 친구들을 잡으러 옛 고갯길로 향합니다. 그나저나 이불속에서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예전 같으면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오르막을 오르는데 다리가 심히 후덜덜해지기 시작합니다.
다리쉼도 할 겸 쉬어가기 좋은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의 메뉴도 발열밥입니다. 찬물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뜨겁게 조리할 수 있어 간편하고 좋긴 한데 양이 조금 적은 게 흠입니다. 곱빼기 출시 좀 부탁합니다.
무심코 밥을 먹는데 오묘하게 생긴 무덤이 시야에 들어오니 나도 모르게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음란마귀가 씌었는지 자꾸 헛것이 보이네요.
식사도 마쳤고, 다시 장비를 챙겨 산을 오릅니다. 이제 고개 끝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고 바로 걸으니 옆구리가 푹푹 쑤시네요.
아픈 옆구리를 부여잡고 잠시 쉬다가 눈이 마주친 비범한 풀떼기를 보며 혹시 난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연산 난초가 비싸 심마니처럼 전문적으로 난초 찾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다는데, 식물 특히 난초는 문외한이라 이번에도 서로 못 본 걸로 합니다.
드디어 고갯길 끝에 이르렀습니다. 고갯길엔 돌무더기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곳이 바로 노다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무더기는 안녕을 기원하는 일종의 서낭당 제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곳으로 오랜 세월 오가는 나그네들이 돈이나 음식, 그릇 따위를 묻어 두기도 하였습니다. 개중엔 아주 크고 번듯한 돌무더기도 있고, 듬성듬성 돌이 흩어져 알아채기 어려운 곳도 있습니다. 이곳은 후자에 속합니다.
탐지기를 휘둘러보니 반갑게도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신호음이 들립니다. 금상첨화로 양지 바른 곳이라 한겨울임에도 땅이 얼지 않았네요.
흙으로 두껍게 코팅되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귀하디 귀한 대한제국 1전이 첫 손님으로 등장합니다. 봉황이 디자인된 멋진 동전입니다.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서 압인방식으로 제작한 동전을 우리나라가 수입해 사용한 것이죠. 후에 인천 전환국에서도 짧은 기간 동안 비슷한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엽전보다는 백배 희소하므로 찾으면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융희 2년(1908년)에 발행한 1전이네요.
와우,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
역시 이불 밖으로 나오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금위영에서 발행한 푸르뎅뎅한 상평통보 중형전이 그 뒤를 잇습니다. 상평통보 뒷면에 나온 글자를 보면 어떤 기관에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희소성이 천차만별이고 가격도 하늘과 땅차이로 벌어집니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엽전이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마치 이탈리아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 듯 조선시대에 고갯길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묻어 놓은 것들입니다. 여담이지만, 트레비 분수에 쌓이는 동전이 1년에 160만 유로(23억 7600만 원)정도 된다고 하죠?
아주 작은 철마가 나왔습니다. 철마는 철로 만든 말인데 솜씨가 조악한 사람들은 이렇게 대충 만들고, 솜씨가 좋은 사람들은 멋진 말의 형태를 잘 살려 예술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호환이 참 많았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호랑이로부터 지켜달라는 주술적 의미로 이렇게 철마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 쪽 다리를 내어주고 호랑이와 싸워 이긴 철마의 흥미진진한 썰은 추후에 풀어보겠습니다.
앙증맞은 크기네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작습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1868~1912년) 1전과 엽전, 열쇠가 나왔습니다. 특히 왼쪽 열쇠는 구리를 녹여 만든 것으로, 조선시대 것으로 보입니다.
곰방대에서 입으로 빠는 부분인 물부리와 엽전이 함께 나왔습니다.
금속탐지인이라면 한 냥, 한 냥 꺼낼 때마다 그 모든 순간을 즐겨야 합니다. 엽전이 잘 나온다고 신나서 날름 날름 주머니에 넣기만 하다 보면 나중에 꺼낸 과정과 디테일한 느낌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진수성찬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지 않고 허겁지겁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 것처럼요. 프랑스 최고급 코스요리를 배고파서 그냥 입에 막 우걱우걱 털어 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탐지기를 스윙해 금속을 찾는 재미, 핀포인터로 점점 실체에 접근해 가는 과정과 긴장감, 수백 년 동안 땅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물건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 처음 마주하는 짜릿함~
그런 과정과 즐거움이야말로 금속탐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인사동 같은 데서 돈을 주고 엽전을 사서 수집하는 것으로는 이런 호사를 절대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후 탐사 최종 결과입니다. 얼핏 보기에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곳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덕분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네요.
한 겨울 위험한 임무를 완수했으니 저는 다음 탐사까지 또 이불속으로 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