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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은 삼엽충 화석의 천국

고생대 캄브리아기 마차리층

by 팔레오

영월 일대에는 약 5억 1,000만 년 전에서 4억 9,000만 년 전인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형성된 마차리층이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인 학자 고바야시 교수가 다양한 삼엽충 화석이 다량으로 발견되는 지층을 발견하고 이를 연구하였습니다. 고바야시 교수는 이 지층에 대해 인근 지명을 따서 '마차리층'이라고 명명하였고, 따라서 지금까지도 이 명칭을 학계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1935년 논문에서 12속 21종의 삼엽충을 보고하였으며
이후 1962년 연구에서는 '53종'의 삼엽충을 기재하였습니다.


한 지층에서 그렇게 다양한 삼엽충이 나온다는 것이 참 대단합니다. 하긴 캄브리아기는 삼엽충의 최고 전성기였으니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과거 논문에서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삼엽충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영월로 향했습니다.



오지 중의 오지인 영월 산골짜기 사이에 피어오른 신령스러운(?) 운무를 보고는 잠시 쉴겸, 멈춰 서서 감상했습니다. 적당히 쉬었으니 다시 출발합니다.



멀리 산꼭대기에 보이는 건물은 영월의 명소인 별마로 천문대입니다. 예전에 이곳을 방문해 쏟아질 듯 많은 별에 둘러싸여 유성과 여름의 대삼각형(데네브, 알타이르, 베가)을 육안으로 보고 천체망원경으로 토성의 고리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한여름밤의 멋진 낭만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었던, 절대 잊히지 못할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별마로 천문대의 모습입니다.



한없이 어두운 밤에, 아래로는 영월의 시가지가 빛나고 올려다 본 하늘엔 별이 쏟아지는 듯 했습니다.



[supercell - 君の知らない物語의 앨범 이미지]
대략 이런 느낌?


supercell의 君の知らない物語(네가 모르는 이야기) 가사에도 여름의 대삼각형이 나옵니다.

잠시 쉬어갈 겸 그 일부를 소개하자면,


あれがデネブ、アルタイル、ベガ

저게 데네브, 알타이르(견우성), 베가(직녀성)

君は指さす夏の大三角

너는 여름의 대삼각형을 가리켰고

覚えて空を見る

떠올리며 하늘을 봤어

やっと見つけた織姫様

겨우 찾은 직녀님

だけどどこだろう彦星様

하지만 어디 있을까, 견우님

これじゃひとりぼっち

이래서는 외톨이잖아


- 후략 -


이 가사를 쓴 사람은 틀림없이 문과적 감성이 넘치고 이과적 지식과 조예가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을듯 합니다. 애니 덕후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보면 좋아할 만한 명곡이죠. 살포시 추천합니다.



오늘도 시작부터 말이 길어지네요. 제가 원래 삼천포로 잘 빠지고 잡소리가 많습니다.

다시 화석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지만, 회색의 마차리층이 일부 드러나있는 고갯길 절개지를 경유해봅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잘게 쪼개지고 부서진 전석들을 많이 보이네요. 돌을 차근차근 살펴보며 화석의 흔적을 찾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네요. 순간 '???' 했다가, 시신경으로부터 전달받은 신호를 뇌에서 분석하고는 "뱀이다. 튀어!"라고 긴급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중추신경과 말초신경을 타고 온 급보를 타전받자마자 다리 근육에 전기신호가 전달, 개구리처럼 폴짝 뛰며 필사의 전광석화 회피기동이 이루어집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0.9초!

'역시 난 빠르단 말이야.'


"어이, 닝겐 도마뱀 처음 보는가?"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흔한 편에 속하는 '미끈도마뱀'입니다. 뱀이 아니라 도마뱀인걸 알고 나자 맥이 탁 풀렸습니다. 괜히 호들갑 떨었네요.


"어이, 닝겐 나를 데려가 키워라!"


일본 애니를 서두에 소개해 그런지 몰라도 도마뱀의 마음이 오덕스러운 애니 말투로 들립니다. 이 도마뱀은 몸에 비해 꼬리가 엄청나게 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리만 살짝 퇴화되면 그냥 뱀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별로... 귀엽지는... 않네요.

"미안하다, 나는 절대로 못 키우겠구나. 다른 도마뱀 집사를 찾아보도록~"



도마뱀이 지나간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올록볼록한 무늬가 있는 전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살았던 부유성 삼엽충인 '글립타그노스투스 레티쿨라투스(Glyptagnostus reticulatus)'로 완전한 형태가 아닌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전체 크기가 약 1~2cm 정도인 이 삼엽충은 머리와 꼬리가 거의 대칭구조를 하고 있어 마치 캐스터네츠처럼 몸을 접어 방어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죠. 마차리층의 대표적인 삼엽충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갯길 절개지 경사가 가파른 데다 화석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층준이나 전석더미를 발견하지 못해 장소를 조금 옮겨보기로 했습니다. 고갯길 절개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천을 찾아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을 탐색합니다.



그러나...

아디다스 마크처럼 세줄 무늬가 있어 삼디다스 모기라고도 불리는 흰줄숲모기떼들이 피에 굶주려 미친 듯이 달려듭니다. 엄청난 모기떼의 모습이 또 시신경을 타고 뇌의 편도체를 후려치자마자 이번에도 즉각적인 필사의 회피기동을 합니다.


역시 난 반응속도 하난 빠르단 말이야


그러나 행복회로가 돌아갔던 시간도 잠시,

양지에 나와 보니 몸 여기저기 십여 군데가 이미 바둑알처럼 부풀어 있네요.

다음에는 에프킬라를 가지고 와 꼭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온 몸을 벅벅 긁으며 철수를 합니다. 네가 철수하면 영희는 누구?(위험한 아재개그병이 또 도지네요. 셀프 따귀 한 대 때리고 오늘은 개드립 자제하겠습니다.)



조금 더 가니 생뚱맞게도 한 초등학교 앞에 M47 패튼 전차와 장갑차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6.25 때 북괴의 침공에 맞서 산화한 '심일 소령'을 기리며 위령비를 세운다고 쓰여 있네요. 아... 그분과 같은 수많은 순국선열의 희생 덕분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자유와 행복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저 안타깝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장갑차는 6.25 때 없던 물건인데 아마 구색 맞추기로 가져다 놓았나 봅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좁은 산길을 따라 왼쪽편에 노출된 지층이 보입니다. 바로 여기서 캄브리아기 삼엽충 화석들이 다량으로 발견됩니다.



굳이 어렵게 지층을 건드릴 필요는 없고 절개지 주변에 떨어져 있는 전석만 살펴봐도 충분히 화석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차리층 삼엽충 화석이 일반적으로 매우 작아서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집에 굴러다니는 작은 돋보기라도 하나 챙겨가면 좋습니다.



절개지 주변 기슭밭에 널브러진 전석을 매의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그닥 어렵지 않게 화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몸을 최대한 숙이고 밭에 흩어져 있는 돌을 관찰하니 무려 5억 1,000만 년 전에 살았던 삼엽충 화석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510,000,000년


대부분 100년도 못 사는 짧은 인간의 삶으로는 쉽사리 체감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시간입니다. 1년에 1원씩 저금해서 5억 원짜리 아파트 한 채를 사는 것에 비유하면 좀 더 쉽게 체감이 될까요?


결국 우리는 죽을 때까지 100원도 못 모으고 가는 짧은 삶입니다.



큼직한 전석에 '프로세라토파기 렉티스피나타(Proceratopyge rectispinata)'를 비롯해 여러 삼엽충의 두부와 미부가 보입니다. 이 작은 돌에 박혀있는 삼엽충들은 모두 5억 원짜리 아파트를 구매하신 분들이 되겠네요.



너비가 약 2cm가량인 선명한 삼엽충의 미부입니다. 마차리층 삼엽충은 종류가 너무 많은 데다 공부도 부족해 모르는 부분이 많으므로 이름을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때문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마차리층에서 가장 흔한 삼엽충은 물에 떠다니며 살았던 부유성의 '아그노스투스 속(agnostus sp.)' 삼엽충입니다.



Hughes et al. (2008) 논문 삽화

이 녀석 또한 앞서 나왔던 글립타그노스투스 레티쿨라투스처럼 몸을 접어 방어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런 부유성 삼엽충으로 알려진 것들이 삼엽충과 무관한, 계통이 다른 생명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마차리층에서 이런 부유성 삼엽충은 매우 흔합니다. 다만 두부와 흉부 미부가 모두 붙어있는 온전한 것은 매우 드물죠. 그래서 아직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삼엽충 화석이 밀집된 셰일판을 발견했습니다.

대충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확대해 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확대사진 #1

다양한 종류의 삼엽충 탈피각들이 한데 뒤엉켜 있습니다.



확대사진 #2

너무 많아 몇 마리나 되는지 세기도 어렵습니다.



확대사진 #3

어떤 것은 양각 또 어떤 것은 음각으로 찍혀있는데, 이는 삼엽충의 탈피각이 위를 향해 흙에 깔렸느냐 뒤집어져 깔렸느냐의 따른 차이입니다.



얼핏 체절이 있는 흉부를 기준으로 위아래가 완전 대칭인 것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두부와 미부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테두리가 각지고 조금 더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미부죠. 이 작은 셰일판에 엄청나게 많은 화석이 박힌 까닭은 아마도 삼엽충의 탈피각들이 조류에 의해 한자리에 모인 다음 한순간에 매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빙겔라 속(Irvingella sp.)' 삼엽충의 두부입니다.



역시 어빙겔라 속의 화석입니다. 약방의 감초같은 아그노스투스 속 삼엽충도 보입니다.



머리 아래쪽이 좌우로 길게 뻗어 나와 있어 어빙겔라와 조금 다른 모습의 '이오추앙기아 하나(Eochuangia hana)'입니다.



두장의 패각을 가지고 있는 이매패(조개류)와 비슷하지만 이것은 패각이 하나인 단판류의 화석입니다. 삼엽충보다 훨씬 드물어 좀처럼 보기 쉽지 않은 화석입니다. 아마도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단판류는 삼엽충만큼 크게 번성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차리층 삼엽충 중 크기로 치면 끝판 대장격인 '하니와이데스 콘카부스(Haniwoides concavus)'의 미부 화석이 깜짝 등장합니다. 삼엽충마다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전체 체장이 미부의 3배 정도이니, 이 화석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체장이 대략 12~15c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니와이데스 콘카부스의 흉부 가운데 떨어져 나온 축엽 하나만 남아 화석이 되었습니다. 좌우 길이가 약 5cm 가량으로 상당히 크네요. 두부 흉부 미부가 온전히 붙어있는 하니와이데스 콘카부스의 완전한 화석은 박물관이나 책, 논문에서조차 아직 본 적도 없고 누가 찾았다는 소문조차도 들은 적 없습니다. 만약 완전한 것을 발견하면 논문 하나 뚝딱 만들어 볼만합니다.



깔끔한 반원의 모양을 한 삼엽충의 선명한 미부화석입니다.



속명과 종명을 동정하기 어려우나 삼엽충의 예쁜 미부 화석들이 계속 발견됩니다. 삼엽충 밭이네요.



그러다가... 자연적으로 조금 갈라져 있던 얇은 셰일판을 책장 펼치 듯 큰 기대없이 열어보았습니다.


마치 모기처럼 매우 작은 흔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크기가 0.5cm 정도로 작아 육안으로 볼 때는 정체를 알기 어려웠는데, 사진을 찍어 확대를 해보니 두부와 흉부 미부가 모두 붙어있는 완전한 형태의 삼엽충 화석이었네요. 흉부에서 수염처럼 길게 늘어진 늑구가 개성적인 이 삼엽충의 이름은 '제고로바이아 코니카(Jegorovaia conica)'입니다. 매우 드문 삼엽충으로 웬만한 논문이나 도감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의 최대 성과네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삼엽충을 곤충처럼 머리 몸통 꼬리 3개로 나뉘기 때문에 삼엽충이라는 이름이 붙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로축을 기준으로 3개의 엽이 있어 삼엽충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것입니다. 삼엽충은 영어로 trilobite인데 이는 그리스어 trilobo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서 'tri'는 '셋', lobos'는 '잎, 엽, 갈래'를 의미합니다.



영월의 명소 한반도 지형

영월은 태백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습니다. 그런데 영월에 주로 분포하는 영월층군과 태백에 주로 분포하는 태백층군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쌓인 지층을 대비해도 공통적으로 산출되는 삼엽충이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 그것이죠. 이는 고생대 시기에 두 지역이 지리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영월과 태백이 고생대에는 서로 1,000km 이상 떨어져 있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영월 동강의 뗏목 체험(어른 6,000원, 어린이 4,000원) 돈값 제대로 합니다.

영월 여행에서 숱한 삼엽충들을 만나면서 이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5억 년이 넘는 시간을 달려 이어진 기적같은 인연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제 겨우 몇십 원 밖에 모으지 못한 찰나와 같은 인생 주제에 감히 상상도 못 할 장구한 시간의 한 조각을 잠시나마 품을 수 있었던 건 정말 경이롭고 감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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