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병아리 나리.
아리를 보내고 내가 많이 슬퍼했는지 아빠께서는 나리를 사 오셨다. 새까만 오골계였다.
하지만 나리는 아리와 다르게 어딘가 모르게 연약해 보이는 병아리였다. 아리처럼 삐-약! 삐-약! 하고 우렁차게 울지도 않고 시들시들해 보였다. 그래도 건강했는지 꽤 오래 살았다. 아리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강했던 건가, 나리에 대한 기억은 많이 없다. 모이통이 모래통인 줄 알고 온몸을 비벼가며 목욕도 하고, 신기한 모습으로 물도 마시고 하던 것이 드문드문 떠오를 뿐이다.
나에게는 나이 차가 좀 나는 오빠가 있다. 도시로 고등학교를 간 오빠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오빠가 방학이라고 집에 왔다. 엄마는 평소에 날 예뻐하셨는데, 그날만큼은 다른 엄마가 되신 것 같았다. 온통 오빠에게만 관심을 쏟으셨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매일 보지만, 오빠는 몇 달에 한번 보니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내심 서운했다. 서운한 맘과는 별개로, 나도 오빠가 와서 기뻤다. 당시 푸세식이던 화장실 문 앞에서 촛불 들고 기다려주기도 하고. 엄마가 안 계실 때는 라면도 끓여주던 오빠다. 꽃가마도 종종 태워주고, 함께 행운의 편지도 보냈으며, 잠자리도 12마리나 잡아주던 다정한 오빠.
나는 오빠랑 나가서 놀다가 왔고, 밥때가 되어 집에 들어왔다. 점심이었는지 저녁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다만, 한 가지만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메뉴가 '닭국'이었다는 것. 아, 이 정도면 앞뒤사정에 대한 예측이 가능했어야 하는 건데. 초등학생인 나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아니, 예측을 했었나? 밥을 먹다가 나리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가족 모두 조용해졌고, 내가 재차 묻자 오빠였는지 엄마였는지 가족 중 누군가가 나리로 닭국을 끓인 것이라고 했다. 국 먹던 숟가락을 내려놨다. 뛰쳐나갈 용기는 없었는지, 닭국만 빼고 깨작깨작 밥을 먹었다. 아리때와는 또 다른 충격으로 슬펐다. 하지만 울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로는 병아리를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꽤 오래 간직하고 있었는데 20대 초반까지도 나리를 그렇게 잃은 것에 대한 속상함이 있었다. 그 후로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아리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리 사건도 떠오른 것이다.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도 나리의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의 원인이 달라졌다. 그때는 나리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엄마 때문이다. 그날 가족들 얘기에 의하면, 닭국을 끓이기 위해선 나리의 목을 비틀고 털을 벗겨야 했다고 한다. 그게 무서웠던 엄마는 아빠께 부탁을 했는데, 아빠께서는 거절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께서 그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리를 식탁 위 국으로 내어 오신 거였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엄마는, 오빠를 위해 그 모든 두려움과 번거로움을 이겨내셨던 거였다. 귀한 아들 닭고기 한 점 먹이고자... 그때의 나는 나리에 대한 불쌍함만 느꼈지만 지금은 안다. 여리고 젊은 엄마가 키우던 닭의 목을 비틀고, 털을 뽑아내셨을 때 얼마나 힘드셨을지.
살짝 '아빠가 좀 대신해 주시지'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아빠도 여린 남자니까♡
"엄마, 사랑해요. 그 모든 희생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