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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통에서 일하는 나

노근본 그린캠프..

by Ubermensch




얼마 전 내가 속해있는 부서에 대한 비방글을 누가 알려줘서 읽게 되었다. 일반 형사부가 한 부에 결재권자인 부장이 있고 그 밑에 평검사가 각 검사실을 꾸리는 것과 달리 이곳은 부장검사들과 계장이 독립적으로 방을 구성해 사건을 맡는다. 아무래도 직급과 연차가 검사장급 되는 분들이 모여계시는 곳이므로 일반 형사부의 검사실에 비해 비교적 사건이 적게 배당되고, 대신 한번 불기소가 되었다가 재기수사명령이 난 까다로운 사건이나, 난이도 있는 사건의 경우가 주로 배당된다. 피의자를 직접 불러다 조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구속사건은 일반 형사부보다는 적다.


그 글과 덧글에 표현된 바에 따르면 내가 속한 곳은 꿀통, 실버타운, 검사와 수사관 쌍으로 어르신, 돈 먹는 하마, 느그적느그적, 천룡인이라고 한다. 노근본 그린캠프 사람들의 꿀통을 깨부수어야 한다고.


나는 지난 인사 때 일반 형사부를 지원해서, 지식재산범죄전담부서 계장으로서 2일 3시간 성실히 근무하고 있던 중, 별안간 아침 출근했더니 난데없이 근무지원 발령을 받고 이곳에 오게 됐다. 우리 부장님도 그전에 다른 형사부에서 부장검사로 계시다가 지원하지 않았는데 오게 된 것이다. 일반 형사부에 비해 배당받는 사건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처분이 까다로운 사건이나 장기 미제가 많기 때문에 우리 부장님과 나는 연휴에도, 주말에도, 평일에도 야근을 해가며 엄청난 속도로 사건을 쳐냈다.


일반 형사부에 계시다 오신 실무관님도 우리가 일반 형사부만큼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부서의 다른 방은 미제가 100건 가까이 되는 곳도 있는 반면 우리 방 미제 사건은 늘 한자리 수를 유지하고, 남는 시간에 부장님과 나는 형사법 공부와 판례정리를 한다. 전문가가 되자고. 우리 부장님과 내가 부서에서 가장 막내라서 그런지 경제범죄 전담임에도 구속 사건은 이상한 환각을 보는 정신병이 있는 강력사건만 오고, 부장님은 거기다 기획 업무까지 담당하신다. 우리는 우리 부서에서 실적이 1위고 정말 열심히 잘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부장님께 그 꿀통을 깨부수자는 글을 낭독해 드렸더니 예상대로 몹시 분노를 하셨다. 그리곤 당장 집무실에 가셔서 피스타치오 봉지를 들고 오시더니 나에게 와르르 부어주시곤 와작와작 까드셨다. 나도 화가 나서 와작와작 까먹었다. 피스타치오를 다 먹고 부장님은 너무 화가 나서 안 되겠다며 자갈치 과자를 또 가져와 내게 또 부어주시곤 더 거칠게 와작와작 씹어드신다. 나는 자갈치 과자는 별로 안 먹고 싶어서 분노에 차서 과자를 드시는 부장님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게 다 부장님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면 요즘 날씨가 쌀쌀해지고부터 부장님이 간부용 초록색 민방위 점퍼를 입고 다니시는데, 내가 재난상황도 아닌데 꼭 그걸 입고 계셔야 하냐고 보기에 부담스럽다고 했음에도, 회사에서 강매당해서 입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부장님이 그 초록색 민방위 점퍼를 입고 다니시니까 우리가 그린 캠프라고 불리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글에 나온 그린 캠프가 뭔지 몰라서 검색을 해봤더니 군대에서 관심병사들을 위한 캠프로써 웃음치료, 미술치료 등을 하는 곳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길래 아주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나는 수사보고를 완성하면 도장을 찍고 내 책상 한켠에 일단 둔다. 하나의 업무를 마치면 잠시 나가서 쉬는 시간을 갖는데, 우리 부장님은 하루에 스무 번 정도 내 자리를 찾아와 서성이시기 때문에, 굳이 번거롭게 결재판에 보고서를 끼워서 부장님 집무실까지 결재를 받으러 갈 필요가 딱히 없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부장님이 찾아오셔서 완성된 수사보고를 발견하시고 직접 도장을 가져와서 찍어주시는 시스템이 우리의 주된 업무 방식이다. 기록도 직접 가져가시고 가져오신다. 대화는 주로 나는 자리에 앉아있고 부장님은 옆에 서서 하는 시스템이고, 가끔은 부장님이 커피도 직접 만들어서 앉아있는 내게 따라주신다. 오늘 점심때 이런 약간 부자연스러운 상하관계를 들은 후배가 깜짝 놀라며, 늘 상사에게 예쁨 받는 비결이 뭐냐고 묻기에, 그냥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잘.


나는 윗사람에게 아부를 하지도 않고 리액션이 좋지도 않고 눈치도 안 보고 할 말도 다 하고 살지만, 일을 열심히 잘한다. 어제 부동산 거래 사기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국토교통부 실거래가격 5년 치를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했더니, 부장님이 이야, 하고 감탄하며 인공지능이 한 걸로 오해받을까 봐 걱정이라고 하셨다. 물론 인공지능 도움 없이 내가 한 땀 한 땀 한 거다.


공무원에게 인사이동이라는 것이 어디 청탁을 해서 좋은 자리만 찾아다니는 게 나처럼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에게 가능한 것도 아니고, 때로는 민원실에서 격무에 시달리기도 하고 운 좋게 편한 자리에 가기도 하고 그런 것이고. 어느 자리에 있든 내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하고 열정을 갖고 잘 해내면 어디서든 당당하게 지낼 수 있다. 인정과 예쁨도 받고, 또 운 좋게 남들이 부러워하는 기관이나 자리에 가기도 한다. 어디에 있든 그냥 내게 주어진 일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열심히 하면 되는 건데, 그린캠프 꿀통이라니. 개별 특수 사례로 집단을 일반화해서 평가하는 방식은 몹시 폭력적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회사도 망하는 거겠지. 집단의 일부가 전체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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