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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의 미학

어느 취발러의 생각

by Ubermensch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에 맞춰 준비자세 프레파라시옹을 한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앙바에서 시작해 등줄기와 쇄골부터 뽑아낸 팔 윗선은 팽팽히 살려두고 팔꿈치 아래는 손끝부터 섬세하게 백조가 날갯짓을 하듯 우아하게 팔랑인후 명치 앞에 동그랗게 모아 아나방. 발레에서 팔 동작을 폴 드 브라라고 한다. 발끝으로 바닥을 쓸어 탁탁 쳐올리는 줴떼, 끈적하고 나른한 폰듀, 한 발로 서서 한 발은 뒤로 뻗고 양팔은 앞 옆으로 뻗어 균형을 잡는 우아한 아라베스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앞뒤옆 발차기 뻥뻥 그랑바뜨망. 발끝으로 서서 뱅글 도는 피케턴, 피루엣. 정강이를 탁탁 절도 있게 치는 쁘라페, 이동하는 파도브레, 글리사드 아쌈블레 점프들- 준비자세인 프레파라시옹부터 시작해 마무리 인사인 레베랑스까지. 발레는 하나하나 용어도 동작도 예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운 발레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예쁘게 보이는 노가다라고 할 수 있겠다.


흐르는 음악에 몸이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뻗어내고 뛰고 돌고 춤추고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인고의 시간과 피나는 고행이 뒤따른다.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매트에서부터 중노동이 시작된다. 도대체 왜 이런 격한 근력 운동을 클래식에 맞추는지 모르겠는 플랭크, 크런치, 런지, 레그레이즈 등등을 레오타드 차림에 쉬폰 스커트를 두른 채 하얀 스타킹을 신고 한다. 옆에서는 포기하고 신음을 내며 매트 위로 퍽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가녀린 체구의 선생님은 고함을 치며 한 세트 더를 외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다 죽어가는 우리 귀엔 평화롭고 아름다운 발레 음악이 조롱하듯 야속하게 흐른다.


복근운동, 등운동, 코어근육 단련을 마치고 나면 스트레칭으로 고관절을 포함한 다리 찢기를 시작하는데 그 또한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올 만큼 고통스럽다. 실제로 선생님은 어디 매달려 사지를 찢긴다고 생각하라며 더 뻗으라고 고함친다. 바닥에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이를 악물고 버티며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이 취미 발레를 하는 건지 고문을 당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 한쪽 발끝으로 서서 배 힘으로 다리를 들고 있자면 땀이 주룩주룩 흐르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그 와중에 선생님은 시선과 표정까지 예쁘게 지으라고 강요한다. 연기는 머리 위로 뿜어라, 지금은 연기가 가슴에서 나온다, 이제는 엉덩이에서 나온다, 지금은 배에서 나온다, 하면서 선생님 눈에만 보이는 투명 연기가 있다. 내 전신 중 힘이 풀린 곳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지적한다.


70분 수업을 마치고 나면 입고 있던 레오타드와 쉬폰 스커트는 마치 거대한 물대포를 맞은 듯 푹 젖고 영혼과 육신은 너덜너덜 털려 있다. 수강생들 모두 탄식을 흘리고 다리를 어그적거리며 탈의실로 향한다. 발레는 실력이 눈에 띄게 느는 장르가 아니다. 괜히 뼈가 덜 굳은 꼬맹이 시절부터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 자연스러운 신체 구조를 뒤틀어가며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일반적인 운동들, 예컨대 등산이나 러닝이나 요가 같은 경우에는 몸이 상쾌할 때가 있는데, 발레는 대부분의 시간이 고통을 견디는 과정 그 자체다. 그저 겉으로 보이기만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위대한 작품이나 철학이나 예술이 그렇듯, 시간과 노력과 고통이 많이 스민 것일수록 그 결과물은 더 황홀하고, 고유하며, 독보적인 아름다움이 깃들게 된다. 쉽게 얻지 못하는 것일수록 그것을 추구하는 욕망과 그 자체가 가지는 고유한 가치가 더욱 솟구치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꾸준히 물대포를 맞고, 근육을 쥐어 짜내고,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디지만, 애써 평화로운 표정을 지으며 발레를 한다.


레베랑스(Reverence), 고통을 승화한 아름다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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