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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가 될 결심

상상의 나래

by Ubermensch






내 내면의 어린아이가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이유는 내가 아직까지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해서인 듯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부모가 됨으로써 또 한 번의 성장을 겪는다. 내 또래 친구들은 부모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혼자 지내기 때문에 실제 나이와 달리 어떤 면에서는 성장을 덜 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고양이를 처음 데려와 5평 자취방에 둘이 살던 시절, 주말 카페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에 처박혀 공무원 시험공부만 하던 때, 나는 잘 못 먹더라도 우리 고양이에겐 영양제도 사 먹이고 좋은 사료를 사줬다. 만약 그 작고 소중한 아기 고양이가 트럭에 치일 위기에 처한다면 고양이를 구하고 내가 대신 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그 작고 소중한 아기 고양이가 열다섯 살이 된 상황인 지금 같은 마음은 아니다. 걘 이제 살 만큼 살았고 내 세면대에 똥오줌을 싸대고 내 물건들을 파손하고 나를 몹시 괴롭혔기 때문에 이제는 미안하지만 트럭에 치이게 둘 거다.


주변에서 또래 친구들이 아기를 낳고 엄마가 된 모습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에는 임신과 출산이 저 먼 얘기처럼 느껴졌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통해 여자의 몸이 얼마나 망가지고, 단순 건강뿐만 아니라 피부와 몸매와 살성과 뼈 구조 자체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다는 적나라한 변화를 경험자를 통해 보고 들은 이후, 현재 내 신체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걸 선뜻 희생하기 싫어졌다. 그래서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자식이 딸려있는 남편을 만나 잘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문득 내 우월한 유전자를 지구에 남기지 않는다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지능과 건강한 체질, 훌륭한 비율과 뼈대, 흰 피부, 미모, 여러 분야에 대한 감각적 재능, 귀여운 아츄 증후군, 기타 등등 내가 가진 탁월한 유전자가 많은데, 이대로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죽어 불태워지기에는 지구의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나 만나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할 수도 없다. 내 자식이 100퍼센트 내 유전자만 물려받아 태어날 것이 아니므로. 그리고 내가 완벽한 유전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상대방과 만나 희석되거나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상대방의 유전자로 대체해 더 완벽해져야 할 부분이 있다. 가령 내 소시오패스적인 성격은 다정한 성정을 가진 유전자와 중화되었으면 하고, 개인적인 취향으로 이목구비가 커다란 사람이 좋겠으며, 아들을 원하기 때문에 키가 큰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유전자의 조합 방식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이건 내 상상이므로 원하는 대로 된다고 가정한다.


부장님이 소개해준 친구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우리나라 미혼모의 정자기증 제도의 합법성에 대해서. 불법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시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외국인인 사유리도 논란이 많았다. 내 생각엔 애초에 아빠가 있다가 버려졌거나, 아빠가 갑자기 죽거나, 부모의 갈등을 지겹게 보다가 이혼해 한부모 가정이 되는 것보다, 처음부터 선택적으로 엄마와 자라나는 것이 그렇게 나쁜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아이에게 완벽한 한 쌍의 부모가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환경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다. 그게 안되고 있는 사람의 차선책으로서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고.


훌륭한 남편의 기질과 훌륭한 아버지의 기질과 훌륭한 유전자를 가진 남성의 존재란 모두 독립적인 변수로서, 셋 모두를 갖춘 사람을 만나기란 확률적으로 굉장히 희박할 것이고, 그 희박한 사람을 내 남편으로 맞이할 가능성까지 곱하려면 벼락을 세 번 맞은 다음 살아나서 로또 1등에 당첨될 정도의 확률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이 보수적인 공무원 집단에서 미혼모로 사는 현실도 녹록지 않을 것이다. 내가 현실의 벽을 뚫고 어렵게 정자 기증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누구랑 연애를 하다가 임신한 채 버려졌다고 생각당할 지도 모르고. 문란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가 생긴 거 아니냐며 수군거릴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부모 가정으로 사는 우리 모자가 겪을 인생의 역경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가정의 자녀로 살아봐서 그게 어떤지 이미 안다. 하지만 내 자식이라면 나름대로 굳건하게 잘 살아낼 것 또한 알겠다. 요즘은 출산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정부 혜택이 나름 잘 갖춰져 있고, 내 소득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정부에서 이런저런 지원을 많이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나 같은 생각을 한 미혼모가 정자 기증센터를 찾았다가 거절당했고, 실제 성공 사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보다 현실적으로 인공수정 말고 실제 수정 방법을 생각해 본다. 대뜸 아무랑 애를 만들자고 할 수는 없으므로,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신원이 보증된 안전한 사람과 애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8.9년 만난 고소한 정수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고소한 정수리와 만날 때 자녀 태명도 지어놨었다. 남자애면 균이, 여자애면 팡이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 청소를 잘 안 하고 게으르고 지저분하기 때문에 각자 집에 세균과 곰팡이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고소한 정수리도 키와 이목구비가 엄청 크고 피부도 하얗고 내 기준 잘생겼고 비율도 좋고 건강하고 성격도 유순하고 머리숱도 빡빡하고 귀여운 천연 곱슬머리에 고소한 정수리 냄새까지 나고 내게 부족한 지리나 공간감각이 탁월하기 때문에 유전적으로는 나름대로 괜찮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로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편으로서는 검증된 실격 사유가 몇 가지 있기 때문에, 내 임신 계획에 정자만 제공해 주면 나는 균이를 데리고 미혼모로 살려고 한다. 양육비는 달라고 안 할 테니 친권을 행사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할 계획이다. 내 계획에 대해 고소한 정수리는 뭐라고 답할지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내 자그마한 몸과, 고양이 두 마리를 건사하기에도 턱없이 벅차다. 엄마나 남자친구가 주기적으로 우리 집 청소를 해주지 않으면 왜인지 집에 머물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해 나는 회사나 도서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아기를 키우려면 환경을 청결하게 유지해야 할 텐데. 내게 남은 가임기간 동안 고민이 더 필요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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