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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당한 사람들

관계의 권력구조

by Ubermensch






모든 관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가 존재한다. 매혹당한 쪽이 약자다. 약자는 권력자를 위해 자신이 가진, 혹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기꺼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권력자에게 인정받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내 지난 연애 관계에서도 남자친구들은 기꺼이 을, 노예, 더 많이 사랑하는 쪽, 약자를 자처했다. 물질, 돌봄, 애정, 관심, 현실적 도움 같은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며 내 곁을 지켰고, 내게 매혹된 다른 수컷들을 경계하며 나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과시하고자 했다.


매혹이란 것은 순수한 끌림이라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지배의 구조를 숨기고 있다. 그것은 지각 체계의 균열을 일으켜 관계의 해석을 통제하는 행위다. 누군가를 매혹시킨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 속에 자신의 형태를 주입하는 것이다. 그의 감정과 인식은 타인에 의해 교란되고 굴절된다. 매혹당한 자는 어떤 결핍을 감지하고, 그것을 채워줄 수 있을 듯한 환상을 기대한다. 매혹한 쪽은 상대의 감정과 사고를 조종한다. 눈에 보이는 폭력과 달리 그 방식이 은밀하기에 피매혹자는 자신의 사고와 헌신이 스스로의 의지라고 믿는다.


매혹은 주로 아름다움의 외피를 쓴다. 피매혹자는 그 아름다운 축의 궤도를 돈다. 이 관계에는 지속적이고도 팽팽한 긴장이 있다. 역학관계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의 형태와는 다르다. 그곳엔 긴장과 통제가 없다.


돌이켜 보면 내가 본질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나는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은밀한 방식으로 관계를 통제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문득 내가 내 감정을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떤 사건이나 충격이 있을 때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기 전에 일단 정지해 두고, 그 상황에 처한 감정을 먼저 낱낱이 분해해 본다. 이 느낌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왜 온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분석이 끝난 이후에서야 느끼기를 허락한다. 내가 통제적인 사람인지 몰랐는데, 평소 생각하는 방식과 느끼는 방식 모두가 어떤 종류의 통제였다. 나를 통제하고 남을 통제하고 관계를 통제하고. 그래서 내가 늘 피곤했고 어딘가 어색했고 그래서 묘하게 남들보다 온도가 낮았던 것이다.


나는 나의 약자적 면모를 이용해 강한 상대를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 보편적인 사람들을 매혹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겉으로 티 나지 않는 방식으로. 관계가 너무 불타면 찬물을 끼얹고 불씨가 꺼져가면 장작을 하나 던지는 방식으로 통제했다. 겉으로 보면 상대가 내게 퍼주는 애정을 받고 관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인상을 받도록 했다. 나와 장기 연애를 한 전 연인들은 아무리 오래 붙어있어도 내가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내게 집착했다. 그 집착은 때론 선을 넘기도 했다.


확실한 건 내가 통제해 온 이런 비밀스러운 권력관계는 정상적이거나 건강한 형태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방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병리적이다. 내가 병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편안하게 내려두거나 긴장을 풀고 상대방의 품에 뛰어들지 못했던 것 같다. 자연스러운 관계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이 의존이 되고, 의존이 통제를 망칠까봐. 그래서 나는 사랑을 하지 못하고 매혹만 시킨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내가 지배력을 행사해야 안심을 한다. 하지만 그 안심이 불안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매혹의 과정에서 나 역시 소모된다. 타인의 욕망을 조율하며 나 또한 그 욕망의 일부가 되고, 시선은 반사되어 돌아오고, 매혹하던 자는 매혹당한 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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