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우리 부장님은 휴가를 거의 안 쓰신다. 오늘은 따님 졸업식이 있어서 휴가를 쓸 예정이시라고 몇 주 전부터 말씀하셨다. 그저께 변호사가 다음날 찾아오기로 했으니 내게 출입 등록을 해달라고 부탁하셨고, 나는 즉시 출입 등록을 완료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고서 부장님께서는 어제 변호사가 오늘 오는 것이냐고 내게 물어보셨다. 오늘 따로 연락은 없었지만 어제 변호사사무실에서 오늘 온다고 했습니다. 부장님은 왜 얘기를 안 해주냐고 하셨다. 나는 의아해졌다. 하루전날 부장님께서 직접 일정을 저에게 말씀해 주셨고, 제가 출입등록을 해드렸고 부장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는데 제가 다시 말씀을 드려야 하는가요? 하고.
부장님께서는 내가 휴가를 쓴다고 열 번도 더 알려줬잖아. 계속계속 이야기를 해줘야지. 하셨다. 이미 알고 계시면서 왜 내게 계속계속 알려달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나는 부장님의 부하직원이므로 할 수 없이 부장님, 오늘 변호사님이 방문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고 한번 더 말씀해 드렸다. 부장님은 휴가를 쓴다고 또 말해주셨다. 왜 서로 알고 있는 내용을 반복해서 공유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부장님과 우리 모두의 일정은 내가 벽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에도 적어 두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심지어 조사받으러 온 피의자도 볼 수 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열 번 넘게 들어서 알고 있듯, 부장님이 휴가를 쓰시는 날이기 때문에 출근을 해서 편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앉아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벽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 오늘은 부장님의 몹시 드문 휴가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환청이 아니었고 이내 내 등 뒤로 난 문이 열리며 부장님은 정말 권위 있는 부장검사님 느낌으로 처음 보는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셔서 우리가 새로 주문한 과자를 냉큼 집어 드셨다. 나는 휴가야. 내가 휴가를 쓰고 어디를 가겠어. 하시며. 우리는 의아했다. 특히 나는 부장님이 안 계시므로 오늘 오후에 집에 빨리 가려고 다른 분께 오후 반가 결재를 올려놓아서 혼자 더 뜨끔했다.
부장님은 실무관님이 새로 주문해 우리가 갓 정리한 과자를 연달아 우적우적 드시며,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사건의 수년 치 영수증 수천 장 중 증거로 쓸 선별 작업을 나만 믿겠다고 해맑게 말씀하신 후, 졸업식에 다녀오겠다고 하셨다. 다녀오신다고요? 부장님은 멋진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부장님 사무실이 아닌 우리 사무실 문을 통해 나가셨다. 문이 훤히 열려있는 부장님 방에 가보니 불도 켜져 있고 컴퓨터도 켜져 있었다. 부장님은 분명 오늘 휴가를 쓰셨는데 따님 졸업식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실 작정이신것 같았다. 내가 휴가를 쓰고 어딜 가겠냐고 하셨으므로. 부장님은 회사를 참 좋아하신다. 나도 내가 부장검사고 내 전용 커다란 집무실이 있고 과자도 많고 나처럼 귀여운 계장을 막 부릴 수 있는 직장이라면 휴가를 쓰고도 회사에 나와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