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사는 사람

우리와 다른 세상의

by Ubermensch






시스템으로 오늘 오후 2시 조사 일정을 잡았다고 구치소에 구속피의자 소환요청을 보냈다. 구치소 담당자는 오후 3시 이후에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점심을 먹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이번에 형사절차가 완전 전자화되면서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방식도 전자화되었기 때문에, 마치 은행처럼 터치스크린 모니터가 생겼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인 나는 새로운 전자문명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현재는 고전방식과 완전전자화된 방식이 혼용되는 단계로, 완전 전자화 사건을 조사하는 일은 오늘이 두 번째 시도였다.


첫 번째 사건에서는 내가 전자문명 사용법을 완전히 숙지하는 것에 실패했으므로 결국 전통적 방식으로 조서를 받아 스캔해서 올렸다. 오늘은 피의자가 도착할 오후 3시 전까지 신기술을 습득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오후 3시 이후 출정이 가능하다던 교도관은 느닷없이 13시 58분에 수갑을 찬 채 죄수복을 입고 꽁꽁 묶인 피의자를 데리고 나타나 내 자체 문명화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조금 곤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조사할 피의자는 전과의 죄명만 해도 수십 페이지가 되고, 어떤 조직폭력단체의 두목 출신이며, 보통 범죄자들은 경제, 폭력, 교통, 성 등 특정 전문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이 피의자는 온갖 분야를 섭렵한 범분야 범죄 전문가였다. 그래서 사전에 몹시 겁이 났다. 나는 의도적으로 부장님께 기록을 들고 찾아가 부장님께서 기록을 먼저 보셔야 하지 않으시겠어요? 했지만 부장님은 괜찮으시다며 내가 보면 된다고 하셨다.


지난주 옆방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 나는 피의자의 입에 담기도 무서운 전과를 나열하며 곧 조사 예정인 구속 피의자에 대한 두려움을 어필해 보았다. 옆방 부장님께서는 우리 부장님 들으시라는 듯, 부장님께 잘 말씀드려서 증거가 충분하고 너무 험악한 사람이면 조사를 생략하고 기소하는 건 어떠시냐고 제안하셨지만, 우리 부장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셨다. 나는 할 수 없이 혼잣말을 가장하며, 그래도 피의자가 난동을 피우거나 저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하면 부장님이 박차고 나오셔서 상황을 제압해 주시겠지? 했다. 옆방 부장님은 내가 가장한 혼잣말에 웃으셨지만 우리 부장님은 여전히 못 들은 척하셨다.


아침에 나는 부장님께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부장님, 제 등뒤 부장님 방 문 열어두고 조사하면 안 될까요? 하고 물었다. 부장님은 그러라고 하셨다. 부장님께서는 처음 한두 번은 부장님과 내 사이에 있는 문을 열어두시고 조사상황을 귀 기울여 들으시더니 나중에는 문을 닫고 볼일을 보셨다. 내가 조사를 다 마친 이후에 최종 검토를 해주시곤 했다. 아침에 약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막상 피의자를 마주하니 왠지 본업 모드로 들어가게 되어 혼자 씩씩하게 조사를 하고 있었더니, 부장님께서 갑자기 등 뒤로 문을 활짝 열어두고 조사상황을 체크하시는가 하더니 내 자리를 오가시며 개입해 주셨다.


역시 부장님께서는 나를 강하게 키우려는 것이었지 아예 방치하거나 위험에 처하도록 버려두신 것은 아니었다. 조금 섭섭할 뻔했다. 사실 부장님께 딸려 있는 수사관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데, 폭력성이 심하고 범죄사실에 공무집행방해죄가 포함된 피의자에게 내가 얻어맞기라도 하면 부장님 마음도 결코 편치 않으실 것이다.


피의자는 예상 외로 고분고분한 태도를 넘어 고개를 푹 숙이고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계속 죄송하다고 했다. 내게 죄송할 것은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한숨을 푹푹 쉬며 후회를 하고, 내내 사죄하는 모습에 나는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부장님이 오며 가며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셔서 피의자는 상대적으로 편해 보이는 내게 심리적으로 의지하는 듯했다. 검사님께 잘 좀 말해달라고 소근거리며 내게 따로 부탁도 했다. 부장님과 내가 약간 굿캅 베드캅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근무성적평가결과를 보게 됐다. 나는 우리 부서 수사관중 가장 막내고, 성과평가는 일반적으로 연공서열 순으로 받는다. 연차가 높은 선배일수록, 승진을 앞둘수록 점수를 몰아준다. 지금 나는 전혀 그 입장이 아니므로 점수가 깔려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내 하반기 평가 점수는 놀랍게도 100점이었다. 동일 직급에서 같은 점수가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 부서 7급 수사관 중에서 내 점수가 가장 높은 것이었다.


이건 사건 처리를 어마어마하게 해내신 우리 부장님과, 그 밑에서 지도편달을 받아가며 열심히 일했던 내 공이 인정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0점이라는 기분 좋은 점수 옆에는 내가 매우 신속하고 정확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훌륭한 능력을 갖춰 성과를 거양했다고 적혀있었다. 이건 다 나를 강하게 키워주신 우리 부장님 덕분이다. 그래서 부장님께 내가 받은 점수를 자랑하고 부장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부장님은 또 못 들은 척하셨다. 조사를 마친 내게 구형 몇 년 할까? 3년? 하며 내 의견을 물어보시고서는 구운 아몬드 향이 난다는 루이보스 티만 가득 따라주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