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menstrual Syndrome
치료를 시작한 지 반년이 됐다. 짧게는 1주 길면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면 원장님은 그간의 내 컨디션과 근황을 묻는다. 5분이 남짓한 짧은 현황보고다. 내가 다니는 병원의 원장님은 뇌공학박사 출신의 전형적인 이과 사람이기 때문에, 내 과거라든지 심리상태에 대해 길게 묻지 않는다. 검사 결과와 현재 증상에 의거한 진단과 처방 위주다. 그래서 편하다. 내 상태는 심각하다고 했지만 어느 특정 부분에 편중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약 종류는 많지만 용량 자체는 저용량이다. 다각도의 정밀한 조정이 필요한 그런 구조인 것이다. 신경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치료가 오래 걸릴 거라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편안해질 거라고 했다. 쓰고 보니 왠지 무서운 말이다.
원장님의 말은 맞았다. 내 치료의 목적은 나를 들뜨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특별히 명랑해지거나 쾌활해지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평평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밤마다 끝도 없이 우주만큼 확장해 나가며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에 눌리지 않게 되었고, 외부적으로 내게 타격을 줄 만한 사건들이 생겨도 전처럼 크게 고통받지 않고 이내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저런 약물이 잘 맞는지 부작용이 없는지 확인하는 조정기를 거친 이후 나는 한 달 치 약을 처방받는다. 챙겨 먹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오전, 오후, 요일별로 나눠진 일주일치 약통 4개에 약을 고르게 분배해서 넣어둔다. 그 약통은 집에도 두고 회사에도 둔다. 아침 약은 회사에서 먹고 저녁 약은 집에서 먹는데, 그러다 보니 회사에는 저녁약이 남고 집에는 아침 약이 남게 된다.
그런 방식이다 보니 금요일에 퇴근을 하고 집에 가니 저녁약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이틀간 저녁약을 먹지 못했다. 잠을 자려다가 메시지가 와서 핸드폰 불빛에 눈을 떴는데 슬프고 나쁘고 안 좋은 생각들이 나를 덮쳤다. 혼자 있었으므로 누가 내게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나는 코가 콱 막히도록 오랫동안 엉엉 울고 말았다. 약을 이틀 못 먹어서 그런 걸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앞으로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싶었다.
내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재미없는 오렌지 치킨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해 주면서 나를 달래줬다. 나는 그 오렌지 치킨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어서 마침내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오렌지 치킨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나를 잘 모르면서도 잘 알고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울고 있는 걸 짐작하고 먼저 물어볼 때가 있다. 그리고 요란하게 달래지 않는다. 그냥 내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말하는 대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오렌지 치킨 이야기가 나온 거다. 그건 효과가 좋았다. 고마웠다.
그렇게 오늘이 되자 피를 봤다. 안심이 됐다.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싶었다. 몹시 예민한 사람답게 나는 PMS가 심한 편이다. 특별한 이유나 별 계기 없이 며칠밤 안 좋은 생각들이 나를 지구의 내핵까지 질질 끌고 가서 어쩔 줄 몰라 질식할 것 같다가 다음날 일어나면 피를 본다. 그럼 이해가 된다. 호르몬 때문이었구나, 하고. 인체의 신비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처한 상황은 납득을 할 수 있냐 없냐에 따라 그 해석과 감당의 정도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일이건 납득을 하고 나면 훨씬 괜찮아진다. 어젯밤이 조금 머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