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이라는 이름의 초대

그건 위로처럼 들렸고, 그렇게 모든게 시작되었다.

by 가람나무숲


그날 편지를 써준 일은 잊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한 줄의 편지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대략 일주일쯤 지난 것 같다.

설계 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내 핸드폰 화면에 낯선 번호로 카톡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정현이에게 편지를 써주셔서 감사드려요.

지난 주말에 정현이를 보러 갔는데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혹시 저희 기억나세요?]



‘정현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곧 기억이 났다.


그때, 백혈병 아이를 위해 편지를 써달라던 그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들의 얼굴은 한 번도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에게서 연락이 오길 바랐다.



[정현이가 나무 씨에게 답장을 썼어요.

혹시 또 답장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그 말에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 ‘선택받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주 목요일, 오전 공강 시간에 만나기로 했다.

지루하던 수업도 그날따라 이상할 만큼 빨리 끝났다.


문방구에 들러 편지지를 고르고,

“1300원입니다.”



그 짧은 대화가 그날의 시작이 될 줄은 몰랐다.

좁은 책상 위에 편지지를 펴고 펜을 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건강해져서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길 바라요.”

단 한 줄이었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온기를 담았다고 믿었다.





며칠 뒤, 서울의 한 역.

“여기예요! 가람 씨!”

낯선 역 안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그녀는 오랜 친구를 부르듯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현주 씨가 조금 늦는다고 하네요. 괜찮으시죠?”

그녀의 웃음은 따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네, 괜찮아요. …그런데 답장은 누가 가지고 오셨어요?”

그녀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현주씨가요. 곧 오실 거예요. 잠깐만요.”

짧은 대화는 자연스럽게 질문으로 이어졌다.


“대학생이시죠?”

“혼자 사세요?”

“무슨 공부하세요?”



나는 짧게 대답하며 가방 속 편지를 꼭 쥐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평범한 대화가,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문 앞에 서 있었다는 걸.




“늦어서 죄송해요.”

그 순간, 또 다른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의 이름은 ‘현주’였다.

그날이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그녀를 만난 날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나무씨.”

그 말이 낯설었다.

이 사람들이 내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 어색함을 감추듯, 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여기, 답장이에요. 글씨가 좀 삐뚤삐뚤하죠?”

그녀는 편지를 펼쳐,

6살짜리 아이의 삐뚤빼뚤한 글자를 또박또박 짚으며 읽어주었다.

그 글씨는 내게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아, 그리고 가람씨.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현주는 마치 미안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단지 답장을 받으러 왔을 뿐인데,

그녀의 눈빛에는 또 다른 부탁이 담겨 있었다.

마침 오전 수업이 공강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이 곤란해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경계심이 없어서였을까.

그냥,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제가 D대학교 심리학과거든요.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셔서요.”

그녀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마음 가는 대로 도형을 몇 개 그려달라는 부탁이었다.



“마음에 드는 도형 세 개를 먼저 그리고,

남은 공간에는 나머지 도형들을 한 번씩만 그려주세요.”

그때는 몰랐다.



그게 그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던 심리검사라는 걸.

나는 천천히, 그리고 성실하게 도형을 그려 건넸다.

그녀는 과제를 끝낸 사람처럼 웃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나도 웃었다.

같은 대학생이니까, 그냥 그랬다.




며칠이 흘렀다.

그 일을 서서히 잊고 있었다.

과제에, 인간관계에, 스무 살의 나는 늘 바빴으니까.

그때,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가람씨, 교수님이 나무씨 그림을 보고 꼭 만나뵙고 싶어하시는데요.

혹시 연락처를 넘겨드려도 될까요?]



그 말에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걸.

그리고 그들이, 그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는 걸.




하루 뒤, 낯선 번호로 연락이 왔다.

교수는 바쁘다며 대신

심리학과 대학원생이자 조교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




[안녕하세요. 현주 학생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혹시 저희 8시쯤 ‘가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내 마음을 이해해줄 누군가가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으니까.





7시 반,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출발했다.

버스 창밖에는 퇴근길 사람들의 불빛이 반짝였다.

“이번 정류장은 가산디지털단지역입니다.”

벨을 눌렀다.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긴장감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의 기대감이 있었다.





‘별다방… 별다방… 어디 있지?’




주변을 둘러봤지만, 익숙한 로고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고, 약속 시각은 다가왔다.

결국, 나는 문자를 보냈다.




‘죄송한데, 제가 근처인데요. 혹시 나와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지방에서 와서 길을 잃은 것 같아요.’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

조교라는 사람이었다.

침착하고 다정한 목소리.

그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건물 사이로,

그 익숙한 별 모양 로고가 보였다.

그 순간, 한 여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가람씨 맞나요?”



그녀의 얼굴은 배우 이보영을 닮아 있었다.

작은 체구, 하얀 사과폰을 쥔 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섰다.

그때는 몰랐다.

그 만남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릴 시작이 될 줄은.





[〈1화 — 이 이야기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습니다〉]https://brunch.co.kr/@a30a80809fce4dc/5

[〈2화 — 백혈병 아이의 편지를 써달라던 그날〉]https://brunch.co.kr/@a30a80809fce4dc/7





✨ 다음 화 예고

“그녀들의 상담은, 내 마음을 읽는 데서 시작되었다.”

– 〈4화 — 상담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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