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

문이 열리면 의심은 멈춘다

by 유흔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그 기분 이해해요. 걱정 말아요, 내가 함께하니까."


이 말이 이토록 시린 말이었을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어려운 길이지만, 일단 문이 열리면 그다음부터는 무장해제에 가까운 확신이 뒤따른다. 나는 그 늪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내 인생에 깔린 복선처럼, 고비마다 나타나는 그의 다정함은 모든 상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었다.




소설 같은 우연이 반복되면 그것은 운명이 된다고 믿고 싶었던 것일까. 특히 가족의 투병이라는, 내게 가장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상황을 그가 똑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성적인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같은 크기의 슬픔을 가진 사람이라는 유대감은,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가장 현실적인 위로의 안식처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마치 자기 일인 양 나를 걱정했고, 가장 가까운 친구도 해주지 못한 정교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실체 없는 메시지일 뿐이었지만, 나는 정서적으로 점점 더 종속되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그가 보내주는 일상 사진과 그와 짧게 나눈 영상 통화는 그가 나와 언제나 함께한다는 실재의 증거가 되었다. 그 순간 이후 그가 하는 모든 말은 검증이 필요 없는 '프리패스'처럼 내 마음을 통과했다.




[설계된 동경]


나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쌓았다고 느낀 후부터,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비상장 코인 투자자로, 이미 몇 차례의 프로젝트를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투자를 정리하고 다시 세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매혹적인 꿈을 덧붙였다.


평소라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이미 '신뢰'라는 열매를 따 먹은 내게 그의 성공담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동경의 지표였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파이어족'에 대한 환상, 그리고 그가 공유해 주는 자신의 개인정보와 투자 데이터들은 그 환상을 뒷받침하는 견고한 증거처럼 다가왔다. 그는 내 안의 불안한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갖고 있는 것처럼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걱정하는 척하며 건네던 다정한 일상 메시지들, 그 사이사이에 스며든 투자 이야기들. 그는 내 마음속에 자신의 성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견고하게 쌓아 올리고 있었다. 다시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순간들 이건만, 왜 그때는 보지 못했을까. 사람이 무언가에 압도당하면 시야는 이토록 좁아지는 것일까.




[스크린숏에 나의 꿈을 보내다]


그와 알고 지낸 지 2주가량 지난 후, 그는 내게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 나를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미래를 함께할 파트너로 믿기에 제안하는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AI 관련 비상장 코인 프로젝트인데, 지금은 극초기 단계라 승인된 사람만 참여할 수 있어요. 친척이 투자 기관에 있어서 접속 코드를 받을 수 있으니 함께 해봐요."


잠시 고민하는 척했지만, 내 안에서는 이미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욕심에 잠식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뢰로 쌓아 올린 둑이 한꺼번에 무너지며 나는 스스로 그 늪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소액으로 투자를 시작해 보기로 한 날, 그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과외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암호화폐에 서툰 나를 위해 모든 단계를 스크린숏으로 찍어 보내라고 독려하며 나를 이끌었다. 가이드는 치밀했고, 속도는 눈이 멀 정도로 빨랐다. 내가 스크린숏을 보내면 2~3초도 지나지 않아 회신이 왔다.


'전문가란 이런 거구나.'


그의 민첩함에 감탄하던 나.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미꾸라지가 이렇게나 빠르고 거침없을 수 있었나 싶다. 다정함이라는 이름의 덫이 내 목을 옥죄기 시작한 줄도 모르고, 나는 그가 안내하는 낭떠러지를 향해 아주 기분 좋게 달려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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