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만추(晩秋)의 기록, 시간의 계단을 오르다

가을소풍여행

by 내셔널지영그래픽
​만추(晩秋)의 기록,
시간의 계단을 오르다

#가을여행 #사찰풍경 #늦가을감성 #인생의계절 #만추의색깔



​짙푸른 하늘 아래, 산사의 단청이 유난히 선명하게 빛나던 날이었다.

켜켜이 쌓인 돌담 위에 핀 노란색과 보라색 국화들이 만개하여,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게 만드는 찬란한 카펫처럼 펼쳐져 있었다.


사진 속 "상왕산 개심사"라고 쓰인 건물 앞에 선 순간, 나는 그 장엄한 돌계단 앞에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 계단은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아래에 주차된 차들처럼 현실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마음의 고도를 높여야만 오를 수 있는 시간의 계단처럼 느껴졌다.

상왕산 개심사

계단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국화 화분들은, 마치 이 가을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축복처럼 보였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쓸쓸함, 그 역설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만추'의 본질이 아닐까.

​경내를 벗어나 숲길로 발을 옮긴다.


듬성듬성 놓인 돌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 은 우리의 삶을 꼭 닮았다.

때로는 평탄하여 숨을 고르지만, 이내 거친 돌계단 이 나타나 발걸음을 재촉한다.

길 위에는 이미 초록을 놓아버린 노랗고 붉은 낙엽들이 가득하다.

땅의 색깔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멈춘 시간들, 그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보다 명료하고 솔직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길 위의 나그네가 아닐까.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숲 속에서, 오직 앞만 보고 걷는 존재.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 은,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파편처럼 부서져 빛났다.

길은 결국 우리를 품어주는 자연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한다.


​낙엽이 수면에 가득 떠 있는 작은 수로를 마주할 때, 걷는 속도마저 느려진다.

물에 비친 하늘과 단풍잎들은 마치 깊은 명상에 빠진 듯 고요하다.


저 물길이 산의 기슭에서 시작되어 어디론가 흐르듯, 우리의 기억과 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물 위에 뜬 잎사귀들은 이 모든 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기꺼이 종착지를 향해 가고 있다.

​인생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벤치 옆, 작은 강아지 집이 눈에 띈다.

지친 누군가를 위해 마련된 이 소박한 보금자리는, 우리 삶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위안은 결국 '멈춤'과 '쉼'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종각 앞에서 만난 화려한 국화들과 서화(書畫) 전시물들은, 이 고요한 공간이 단순히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예술과 문화를 끌어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추의 풍경은 우리에게 단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삶은 반복되는 계절과 같다.

지금은 낙엽이 지는 만추이지만, 이 끝이 곧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눈앞의 길을 걷는 털 복슬복슬한 강아지처럼, 우리도 순수한 발걸음으로 이 계절의 끝과 다음 계절의 시작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가을의 기록은, 그렇게 시간을 통과하는 모든 존재에게 바치는 고요한 감동이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