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없는 감옥에서 시작된 나의 인도네시아

살아남기 위한 작지만 단단한 결심

2002년 6월 2일.
월드컵 열기로 대한민국이 들썩이던 그때,
나는 인생의 또 다른 경기를 시작하듯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착지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조용했던 그 도시에서,
나는 ‘결혼’이라는 단어만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새신랑은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해 밤 9시에야 퇴근했다.
나는 인도네시아어 한마디 못했고, 날씨는 덥고,
길은 낯설고 사람들은 무서웠다.
하루 종일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결국 눈물이 터졌다.
27살이나 먹고 이렇게 우는 내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고,
무엇보다 이 상황이 한심하고 괴로웠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말,
그게 바로 이런 상황이구나. 절절히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나름 우여곡절 많은 삶을 지나왔기에,
살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혼자 인도네시아어 책 6권을 펼쳐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익혔다.
쭈뼛쭈뼛, 어색한 발음으로 도우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인도네시아에선 대부분의 가정이 도우미를 고용했다.
한 달 월급이 원화로 약 5만 원 정도였기에
거의 필수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조금씩 동네를 다니며 현지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전거를 구입해 동네 밖으로도 나가봤다.
혼자 음식점에 들어가 비훈 아얌(bihun ayam, 닭 쌀국수)을 시켜 먹기도 했다.

처음엔 개미가 둥둥 떠다니는 국물을 교환해 달라 했지만,
몇 번 겪고 나서는 숟가락으로 쓰윽 걷어내고 그냥 먹었다.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카르타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걸 체감했다.

‘진짜 부자’, ‘부자’, ‘중산층’, ‘서민’,
그리고 정말로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까지.

중산층 현지 어머니들은
나에게 도우미와는 친구처럼 지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 말이 못내 불편했다.
같은 사람인데 왜 구분하고, 차별하나 싶었다.

그래서 더 잘해줬다.
그 아이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LA갈비, 옷, 장신구, 음식…
정말 아낌없이 나눠줬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어머니가 아프다며
100만 루피아(약 8만 원)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 집에서 여러 물건들이 사라졌다.

나중에 듣자니,

옆 동네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다.
23년 동안, 비슷한 일을 수없이 겪었다.

배낭 가득 물건을 훔치다 들킨 도우미,
그 안엔 임신부 속옷, 한국 펜, 한국 라면, 고가의 재킷…
종류도 다양했다.


가장 큰 충격은
매일 오후 5시, 내가 아이와 산책을 나간 사이
내 지갑에서 수십만 원을 빼가던 도우미였다.
지폐에 일일이 번호를 써두고 확인했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정직한 도우미도 있었고,
함께 웃고 울며 몇 년을 가족처럼

지낸 아이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이든 인도네시아든
어른들의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경험자들이 들려주는 조언은
때론 내 뜻과 다를지라도,
귀 기울일 가치가 있었다.




이제 반백 년을 살아온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그 물음이 나를 앞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란다.



by 23년 차, 자카르타 언니

단어
비훈(Bihun)쌀국수면
아얌(Ayam)-닭

사진출처
Resep Bihun Kuah Ayam Suwir yang Hangat Gurih Buat Sahur https://share.google/JnHO4s8GyzEDVq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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