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의 문양을 입은 날

-유네스코가 인정한 인도네시아의 바틱 이야기



“Batik 입고 오세요”


자카르타에서 일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행사에 초대받는 일이 많다. 이때 빠지지 않는 드레스 코드는 바틱이다.
바틱은 인도네시아에서 공식적인 복장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선택된다.




Batik Day의 풍경

처음엔 ‘바틱이 뭐지?’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그냥 문양 있는 천으로 만든 옷인가 싶었는데, 자카르타의 금요일 아침 풍경은 조금 특별했다.
사무실, 백화점, 공공기관 어디를 가도 바틱을 입은 현지인들로 가득하다. 이른바 ‘Batik Day’.
인도네시아의 전통 의상인 바틱을 입고 일상 속에서 문화를 지켜가는 날이다.




대통령이 만든 문화

이 문화는 단순한 권장 캠페인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의도적으로 만든 움직임이다.
바틱이 자국 고유의 전통문화라는 인식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와 바틱의 원조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 2004–2014)는
2009년 바틱의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매주 금요일 바틱을 입자고 장려했다.




문양에 숨은 뜻

나도 그 분위기에 이끌려 바틱을 자주 사 입었고, 어느 날은 바틱에 대해 공부할 기회도 생겼다.
그러다 알게 됐다. 바틱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계급의 언어'였고, 문양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는 걸.




왕족의 문양, Parang

특히 왕족만 입을 수 있었던 바틱 문양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중 하나가 바로 ‘빠랑(Parang)’ 양이.
파도처럼 반복되는 이 문양 권위와 힘, 왕권의 영속을 상징한다. 전통 의례용 무기인 크리스(Keris)에도 새겨졌던 이 문양은, 한때 왕가와 귀족만이 허락된 문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문양의 바틱을 입고 나타나면, 현지 친구들이 “왕족이네?” 하고 웃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나도 웃었다. 왜냐하면 일부러 왕족 문양만 골라서 샀으니까.

빠랑(Parang) 문양




‘입는 법’은 내 방식대로

나는 원래 디자이너로 일했기 때문에, 옷을 사면 그냥 입는 법이 없었다. 긴팔 바틱 셔츠는 소매를 잘라 나시로 리폼하고, 심플한 옷의 어깨나 주머니엔 바틱 천을 덧대 포인트를 주면, 나만의 ‘데일리 바틱룩’이 완성된다. 평소에 바틱을 자주 입다 보니

"어디서 구입했어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었기에 한때는 바틱을 리디자인해 세미바틱 샵을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다.




바틱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바틱은 만드는 방식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1. 뚤리스 (Batik Tulis)
‘손으로 직접 그리는 바틱', 짠띵(canting)이라는 도구에 왁스를 담아 천에 하나하나 그려 넣는다. 염색과 건조를 반복하며 완성되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진짜 예술이다.

2. 짭 (Batik Cap)
금속 도장을 이용해 찍는 방식. 일정한 문양을 찍어내 대중적으로 보급 가능하다.


3. 프린트 바틱 (Printed Batik)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인쇄 바틱. 문화적 깊이는 얕지만 가격은 저렴하다.

바틱 가게에서 “이건 수공예예요” 또는 “프린트예요”라고 알려준다. 나는 사람 손이 닿았던 오리지널 바틱에 정이 간다. 다만 핸드메이드인 것만큼 고가이다.

짠띵(canting) 도구




유네스코도 인정한 가치

Batik은 그 문화적 깊이 덕분에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전통 무기 크리스(Keris) 역시 2005년에 유네스코 등재된 바 있다.
날이 휘어진 형상의 의례용 칼인 크리스는 단순한 무기를 넘어 ‘신성한 물건’으로 여겨지며, 운명을 지킨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세까르 자가드(Sekar Jagad) 문양




문화는 옷을 타고 스며든다

이 모든 걸 알게 된 건, 단지 ‘옷 한 벌’을 사 입으면서부터였다. 어쩌면 문화란 그렇게 스며드는 것 같다. 내가 선택한 문양, 그 옷을 입고 걸었던 날들 안에 내가 끌렸던 역사, 철학, 농담이 들어 있었다.




왕족은 아니지만

바틱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나만의 방식으로 입기 시작하면서 자카르타의 삶도,

내 일상도 조금씩 변해갔다. 왕족 문양을 입었다고 내가 왕족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 도시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잘란잘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by 23년 차, 자카르타 언니





참고 및 사진 출처
Batik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2009)
Keris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2005)

7 Legends Behind Batik Patterns - Indonesia Travel https://share.google/9AFa5PyDj5kmaLPjA


Empat Cara Merayakan Hari Batik https://share.google/YxDTTZWU8r28wlCY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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