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는 늘 나보다 반 걸음 앞서 있었다. 같은 나이인데도 대화할 때 고르는 단어, 사고의 깊이, 빠른 판단과 결정까지… 마치 스타워즈의 제다이처럼 오래 단련된 정신을 지닌 사람 같았다.
그런 단단함 때문에 멀게 느껴지다가도 집안이 힘들던 시절을 스스로 견뎌낸 사람만이 갖는 성숙함과 서민적인 식성, 가끔 흘러나오는 소탈한 유머, 순간마다 스며드는 인간적인 따뜻함 때문에 어느 순간 또 금세 가까워지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날 우리는 리저브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커피 세 잔을 테이블에 두고 있었다.
갈라파고스 라 토르투가.
잔을 기울이자 레드 커런트와 레몬 시트러스 향이 얇게 흘렀다.
연우는 잔을 살짝 돌리며 향을 들이켰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는 그 짧은 순간, 무언가 떠올린 듯 눈매에 부드러운 빛이 흐르고 지나갔다.
“이건 네가 좋아할 맛일 거야.”
그가 잔을 내 앞으로 밀었다.
손등이 스쳤다. 그 짧은 스침이 불빛 아래서 유난히 크게 흔들렸다.
두 번째는 인도네시아 웨스트 자바 자무주.
꿀과 헤이즐넛 버터 향이 스르르 녹아들며
달콤한데 묘하게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줬다.
연우는 이 향이 좋다며 나에게 맡아보라고 살짝 기울였다. 그가 가까이 오자 커피 향 아래서 그 남자의 체온이 묻어났다. 눈을 마주치니 읽히지 않는 눈빛.
세 번째는 태국 매 홍 손.
부드러운 바디 속에 구운 캐슈너트의 깊은 향.
“이건 온도가 식으면 더 진해져”
그가 잔을 들며 말했다.
위험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너무 많은 것을 읽는 남자였다.
“소이.”
그가 불렀다. 세 잔의 향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나는 연봉은 높지만 그만큼 일해. 늘 바빠.
근데 웃긴 건… 돈을 벌어도 쓸 시간이 없더라.”
그는 잔을 들며 가볍게 말했다.
“… 내가 번 걸 대신 써줄 여자가 있으면 좋겠어.”
그리고 컵을 톡톡. 바 테이블 아래에서 울리는 작은 진동. 묘하게 오래 남는 울림이었다.
“그런 사람… 있을까. “
“우리, 잘하면… 내가 네 꿈의 남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숨이 잠깐 멎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여자가 원하는 틀에 맞춰 살 순 없어.”
그가 잔을 기울이며 낮게 말했다.
“늘 내 중심으로 살아왔으니까.”
나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말없이 남은 커피를 마셨다. 그 향은 너무 선명해서 옷에 오래 남았다.
카페 문에서 서로 돌아서는 순간 그날은 유난히 연우의 스치는 체온이 커피 잔향보다 더 오래 남는 날이었다.
그게 커피 때문인지 연우 때문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