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집으로 가는 젖은 길

— 성실함은 통과되지 않았다

by 불망

그날,


스무 개의 시선, 마흔 개의 눈이

모두 같은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리숙한 나를 향해서.


면접 때 나는 말했다.

“열심히 배우고 싶어요.”


수간호사님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 그건 내 특기야.

특. 별. 히 잘 알려줄게.”


그리고 그 수간호사님은

특. 별. 히. 나를 공부시켰다.


눈만 마주치면 씩 웃으며

약어 풀네임을 읊으라 했다.


전광판에 홀로 서서,

모두의 눈길을 받으며.

PROM, CPD, LAVH, NSVD…

단어인지 암호인지 모를 약어들을 내뱉어야 했다.


손등에 적고,

손바닥에 적고,

종이에 적고— 또 적어도

자꾸 기억에서 날아갔다.


어느 날은, 의자와 의자를 사이에 두고

수간호사님은 조용히 시험지를 내밀었다.


“자, 오늘 시험 보기로 했었지.

불망씨. 풀어봐.”


나는 숨을 들이쉬고 펜을 잡았지만

글자가 갑자기 모자이크처럼 흩어졌다.

보다 못한 수간호사님이 말했다.


“… 불망씨.”

“네…?”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쌍해서.


그 짧은 몇 분 동안

나는 벼락치기 선생처럼 약어를 베끼고,

외우고, 다시 쓰고, 틀리고, 또 외웠다.


되돌아오는 건 매번 싸늘한 눈초리였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에도.


2년 동안

집 가는 길은 늘 젖어 있었다.


누가 혼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부족해 보여서.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울다 보면 다음 날 또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포기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내 발걸음 뒤엔 늘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내 그림자와,

프리셉터의 그림자.


그녀는 늘 한 발 뒤에서

말없이 따라다녔다.


실수를 하면 차라리 혼나고 싶었는데,

그녀는 커다란 안경 너머로

나를 조용히, 날카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하필 그날이었다.

하필이면, 출혈이 있던 산모였다.


시트 아래로 점점 붉게 번지는 자국을 보다가

나는 결국 몸이 먼저 흔들렸다.


프리셉터는 나를 스치듯 보면서도

신속하게 패드를 갈고

수액 처치를 마쳤다.


그리고 한 달 만에 그녀는 처음 내게 말했다.

“불망씨, 환자보다 먼저 놀라면 어떡해.

그래서… 환자랑 보호자가

어떻게 불망씨를 믿겠어?”


늘 침묵하던 그녀의 그 한마디에

내 얼굴은 물들어 가는 시트보다 더 붉어졌다.


퇴근길,

질질 끌리듯 늘어지던 발걸음.

항상 그랬다.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자꾸 따라오지 않는 절망감.


다인실 식판을

두세 겹 포개 들고 허둥대며

뛰어다니던 그 성실함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병동이 원한 건

성실함이 아니었다.


유능함.


그 단어는

생각보다 잔인했다.


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나는 또다시 같은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능하지도 않고,

눈치도 느리고,

실수할까 봐 늘 가슴이 먼저 뛰는 신입이었지만—


이상하게,

발길은 자꾸 그곳으로 돌아갔다.


아마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느려도,

조금은 둔해도,

‘계속해보자’는 마음이

내 안에서 작게,


아주 작게,

불씨처럼

깜빡이며 살아나기 시작한 건.


그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