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 내 그림자를 얇게 하던 아이

— 빛 옆에 서 있던 날들

by 불망

물갈이는 없었다.

막내는 오래도록 나였다.

그 아이가 들어오기 전까지.


퇴사도 없고 신입도 없으니
병동의 궂은일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됐다.


전화벨이 울리면
늘 내가 제일 먼저 뛰어갔다.


예민해 늘 말랐던 나는

실수하기 싫어 귀까지 곤두세우고 지냈지만,

누가 지시해야 그제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느 아침이었다.


보라색 유니폼을 입고

아침 햇빛처럼 환하게 웃으며

병동으로 들어온 아이가 있었다.


처음 본 순간 알았다.

아, 이 아이는… 사랑받는 사람이겠구나,

바로 그렇게 느꼈다.


제법 통통한 체구였는데

허리를 숙였다 펴는 속도부터가

나보다 두세 배는 빨랐다.

우사인 볼트처럼 움직였다.


나는 늘 긴장이 먼저였고

무슨 일을 하든 ‘실수하지 말아야지…’

그 생각부터 떠올렸는데,

그 아이는 그런 것 없이 일단 몸이 먼저 나갔다.


그 아이가 다리를 먼저 쓴다면

나는 마음만 먼저 쓰는 사람이었다.


그 아이 주변엔 늘 사람이 몰렸다.


귀 기울여보면,

L원장님, R원장님, A원장님, H원장님…


제스처도, 걸음걸이도, 목소리도

심지어 화내는 소리까지

귀신같이 따라 했다.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고

그 아이는 또다시 누군가를 떠올리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예민해 있던 내 귀 끝이

잠시나마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아이의 또박또박한 목소리는

낯선 병동 속에서 잠깐 숨 돌릴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쉼터 같았다.


빛은 늘 먼저 흔들리고,

나는 그 뒤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사람.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는데도

그 아이는 늘 ‘더 먼저’ 웃었다.

그 아이가 웃으면 내 그림자도 잠시 얇아졌다.


그 아이에게 내가 가장 놀랐던 건,

속으로 삼키는 법이 없다는 거였다.


할 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입을 열면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지고

사람들의 표정도 풀어졌다.


“불망언니, 이거 내가 알려줄게~”


“선생님, 이건 조금 다르게 해야 해요.”


“아이참 샘, 그거 어제 잘못하고 가셨어요!”


분명 틀린 걸 지적하는 말인데도

그 말투에는 희한하게, 기분 나쁜 결이 없었다.


반면 나는—


늘 삼켰고,

참았고,

견디다가,


결국

기분 나쁘게 터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내 말은

나가기 전에는 너무 많고,

나간 뒤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 아이의 말은

가볍게 나갔지만,

한 번도 가볍지 않았다.


처음엔 부러웠다.

그다음은, 조금 조용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아이가 내 대신 먼저 말해주는 걸 보며

나는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됐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아이 옆에 있으면 나도 마음을 조금 덜 삼켜도

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아이의 밝음이

내 우울을 없애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 그림자를 잠시 얇게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빛이었다.


나는 그 빛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아이는 모를 것이다.


내가

그 빛에

얼마나 오래 기대고 있었는지.


그 아이가 없는 병동은

조금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