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 옆에 서 있던 날들
물갈이는 없었다.
막내는 오래도록 나였다.
그 아이가 들어오기 전까지.
퇴사도 없고 신입도 없으니
병동의 궂은일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됐다.
전화벨이 울리면
늘 내가 제일 먼저 뛰어갔다.
예민해 늘 말랐던 나는
실수하기 싫어 귀까지 곤두세우고 지냈지만,
누가 지시해야 그제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느 아침이었다.
보라색 유니폼을 입고
아침 햇빛처럼 환하게 웃으며
병동으로 들어온 아이가 있었다.
처음 본 순간 알았다.
아, 이 아이는… 사랑받는 사람이겠구나,
바로 그렇게 느꼈다.
제법 통통한 체구였는데
허리를 숙였다 펴는 속도부터가
나보다 두세 배는 빨랐다.
우사인 볼트처럼 움직였다.
나는 늘 긴장이 먼저였고
무슨 일을 하든 ‘실수하지 말아야지…’
그 생각부터 떠올렸는데,
그 아이는 그런 것 없이 일단 몸이 먼저 나갔다.
그 아이가 다리를 먼저 쓴다면
나는 마음만 먼저 쓰는 사람이었다.
그 아이 주변엔 늘 사람이 몰렸다.
귀 기울여보면,
L원장님, R원장님, A원장님, H원장님…
제스처도, 걸음걸이도, 목소리도
심지어 화내는 소리까지
귀신같이 따라 했다.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고
그 아이는 또다시 누군가를 떠올리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예민해 있던 내 귀 끝이
잠시나마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아이의 또박또박한 목소리는
낯선 병동 속에서 잠깐 숨 돌릴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쉼터 같았다.
빛은 늘 먼저 흔들리고,
나는 그 뒤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사람.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는데도
그 아이는 늘 ‘더 먼저’ 웃었다.
그 아이가 웃으면 내 그림자도 잠시 얇아졌다.
그 아이에게 내가 가장 놀랐던 건,
속으로 삼키는 법이 없다는 거였다.
할 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입을 열면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지고
사람들의 표정도 풀어졌다.
“불망언니, 이거 내가 알려줄게~”
“선생님, 이건 조금 다르게 해야 해요.”
“아이참 샘, 그거 어제 잘못하고 가셨어요!”
분명 틀린 걸 지적하는 말인데도
그 말투에는 희한하게, 기분 나쁜 결이 없었다.
반면 나는—
늘 삼켰고,
참았고,
견디다가,
결국
기분 나쁘게 터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내 말은
나가기 전에는 너무 많고,
나간 뒤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 아이의 말은
가볍게 나갔지만,
한 번도 가볍지 않았다.
처음엔 부러웠다.
그다음은, 조금 조용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아이가 내 대신 먼저 말해주는 걸 보며
나는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됐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아이 옆에 있으면 나도 마음을 조금 덜 삼켜도
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아이의 밝음이
내 우울을 없애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 그림자를 잠시 얇게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빛이었다.
나는 그 빛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아이는 모를 것이다.
내가
그 빛에
얼마나 오래 기대고 있었는지.
그 아이가 없는 병동은
조금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