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들의 버킷 리스트, 그리고 나의”

죽기 전에 꼭 뭘 해야만 하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나요.

위태위태하게 한 생명을 받치고 있던 양동이(버킷)를 발로 차버리는 걸로 교수형을 집행했다는 역사에서 "양동이를 차다(kick the bucket)"는 말은 죽다는 뜻을 담은 숙어가 되었단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의미의 가지가 뻗어 나와 "버킷 리스트" 즉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칭하는 말이 생겨났다..... 영특하고 둥글 동글 내 보물 친구 안수현 님의 설명이다. 역시, 똑 부러지는 설명이다. 종종 그님에게서 글쓰기의 기본과 감을 배운다. 지식면과 묘사면에서는 나와는 다른 on othere lebel...


버킷 리스트라니.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내겐 떠오르는 게 없다. 반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얄궂고 속상한 일도 많았고, 눈부시게 찬란할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남겨둘 ‘리스트’?

글쎄,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없다.


그럴 땐 청소가 답이다.
베란다 구석구석,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물건들을 쌓아두던 시절, 나는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았을까. 남편 앞에서 작아지는 나에 대한 화풀이였을까, 시댁과의 갈등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흐릿해졌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쌓기만 한 것들은 결국 흉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문득 열어본 마트용 지퍼백.






세상에나, 그 속에 있던 건 바로 내 보물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노는 데 익숙했던 나는 인형이 최고의 친구였다.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인형놀이처럼 즐기곤 했다. 내 마음대로 옷을 입히고, 꾸미고, 노래 부르고… 그 시절의 작은 기쁨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거다.

파올라 레이나 시리즈 32cm 인형 서른 개쯤.
마치 오랜만에 얼굴을 본 주인을 향해 수군대는 것 같았다.


“주인님, 우리 죽기 전에 한 번만 더 사랑해 줄 수 없나요?”
“왜 다시 지퍼를 닫으셨어요? 우리 잊지 마세요!”


밤새 속삭이는 듯한 그들의 목소리에, 마음이 묘하게 저릿했다.

다 큰 어른이 인형놀이 한다고 시어머니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게 뭐 어때서. 그건 내 취미였고, 내 방식의 위로였다. 바늘귀가 잘 보이지 않아 손바느질을 못 하게 된 지금, 인형 옷을 새로 지어줄 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따뜻함은 남아 있다.

인형들을 버려야 할까, 아니면 다시 꺼내어놓을까. 손에 쥔 걸 쉽게 놓지 못하는 내 성정이 이번에도 드러난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버킷 리스트는 꼭 거창할 필요 없다는 것.
누군가는 세계 여행을, 누군가는 커다란 업적을 적어두겠지만, 내겐 잊었던 인형을 다시 꺼내 안아주는 일, 책장을 채우고 책을 읽는 일, 그 소소한 기쁨들이야말로 버킷 리스트 아닐까.


지퍼백은 아직 닫힌 채 있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안다.
인형이든 책이든, 아니면 나 자신이든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다시 한번 더 사랑해 주는 것
:

:

:

:

:

그리고 오늘 밤, 괜히 좀 긴장된다.
혹시 꿈속에서 인형들이 줄줄이 나와 “주인님~ 아직 우리 안 씻겨주셨어요!” 하고 들러붙으면… 나는 아마 코 고는 소리로 대답하겠지. 크크.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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