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연극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연극수업은 강사선생님이 3주에 걸쳐 총 세 번의 수업을 진행합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라 장기간의 프로젝트 대신 단기간에 마무리할 수 있는 주제로 3주간의 수업을 이어갑니다.
일상
주제는 아이들의 일상입니다. 본인들이 일상에서 찾은 모습을 연기합니다. 자기 자신을 연기해도 좋고, 자기 주변의 누군가를 연기해도 좋고, 자신이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상황을 연기해도 좋다고 큰 테두리를 정해줍니다.
강사선생님이 몸소 예시를 보여준 후, 1분간 각자 생각의 시간을 가집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표현할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듭니다.
매일 보는 아이들이지만, 제 시간이 아닌 다른 수업 시간에 보는 아이들은 마치 다른 아이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치며 고민하는 아이부터 머리를 감싸 쥐고 긴 한숨을 내뱉는 아이까지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민에 빠져듭니다.
고민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긴장감에 쭈뼛거리는 것도 잠시, 아이들은 자신의 일상을 짤막한 일인극으로 재치 있게 선보입니다. 집에서 있었던 일부터 학교, 학원 등 일상에서 겪었던 일들을 각자의 관점에서 보여줍니다. 학교에서 보아왔던 아이들의 모습이 일상에 그대로 녹아내려져 있습니다.
그때, 아이 하나가 학기 초 3월 첫날 우리의 첫 만남을 일인극으로 풀어냅니다.
저는 학기 초 아이들에게 항상 '예의'를 강조합니다. 예의는 인간 삶의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기에 예의를 갖추지 못한 인간은 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고 수시로 이야기하지요.
그 예의의 첫 번째가 바로 '인사'입니다.
저는 3월 첫 만남에 인사를 바르게 하지 않는 아이에게 제대로 인사를 할 때까지 수 차례 인사를 반복시킵니다. 잘못한 걸 모르면 가르쳐 주는 게 선생님의 일이기에, 저는 해마다 인사를 강조합니다.
올해 3월도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3월 4일, 첫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인사도 없이 앞문으로 휙 들어옵니다.
누군가는 개미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를 속삭이며 들어옵니다.
누군가는 눈인사로 고개만 슬쩍 까닥인 채 교실로 들어옵니다.
누군가는 인사도 없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선생님은 교실에 없는 사람인 양 저벅저벅 들어옵니다.
잘못된 첫 단추는 첫날부터 바로잡습니다. 제대로 인사할 때까지 몇 번이고 인사를 다시 시킵니다. 허리 숙여 공수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아이 몇몇은 첫 만남에 수차례 인사를 다시 했습니다. 그게 아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나 봅니다.
3월 첫날 수차례 인사를 다시 했던 아이의 연기가 끝이 났습니다. 연기를 본 다른 아이들이 격하게 공감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맞아, 나도 그때 인사를 다시 했어.
-난 일곱 번이나 인사를 다시 했어.
-나도 다섯 번은 다시 했을 거야. 진짜 무서웠는데.
-우리 반에 인사 다시 안 한 애가 누가 있었나?
-난 앞에 진영이가 인사 다시 하는 걸 보고 제대로 해서 한 번에 통과했는데.
아이들은 뒤쪽에 앉아있던 선생님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뒤늦게 선생님의 눈치를 살핍니다. 웅성거림은 잦아들지 않고 첫날 느낀 낯설음에 진저리 치며 그날을 떠올립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니 긴장으로 가득했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선생님도 실소가 터져나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도 첫날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나 봅니다. 왜 예의가 중요하고, 왜 인사가 중요한 지 지난 일년 간 누차 이야기했건만 아이들에게는 본인들이 다시 인사한 횟수만 기억에 남나 봅니다.
인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마중물입니다. 아직은 열세 살 어린아이들이기에 선생님 말이 와닿지 않겠지요. 실상 반강제적으로 시작한 예의 바른 인사이지만, 1년을 지속해 온 저희 반 아이들은 이제 우리 학교 그 누구와 비교해도 정중하게 인사하는 게 습관으로 잡혀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마주치면, 그 자리에 멈추고 공손한 자세로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아직 왜 이런 인사가 필요한 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요. 비록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 동안 내가 만든 습관화된 몸의 기억이 언젠가는 아이들 마음에 녹아들겠지요? 먼 훗날 우리 아이들도 무서워 긴장했던 기억이 아닌, 첫날 선생님이 했던 말과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이해했어요"라고 말해주길 바라야겠습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선생님은 내일도 예의 바르게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어 보아야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야,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