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거리는 바람에 가을이 완연하게 묻어납니다. 오늘 과학 수업은 태양의 남중고도를 측정하는 시간입니다. 측정을 위해 과학실이 아닌 1층 현관에서 과학선생님과 수업을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2시간짜리 과학 수업이 끝나면 곧장 점심시간입니다. 수업을 마칠 즈음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러 1층 현관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아이들이 가을바람을 맞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이제 막 과학 수업이 끝난 모양입니다.
현관에 도착하니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남자아이들이 갑자기 선생님 주위로 몰려듭니다. 제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을 보니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심각한 표정에 짐짓 태연한 척 하지만, 선생님 머릿속은 순식간에 열세 살이 저지를 수 있는 사건사고 리스트로 가득 채워집니다.
-왜? 무슨 일 있어?
-선생님, 저희 교직원 화장실 써도 돼요? 바깥쪽 손 씻는 곳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아, 다행이다. 교직원 화장실 때문이었나 봅니다. 별 일 아닌 일에 한 시름 놓은 선생님은 아이들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쉽니다. 하긴 팻말에 교직원화장실이라고 버젓이 안내되어 있으니, 아이들 입장에선 고민일 수 있었겠네요.
-물론 사용할 수 있지. 다만 교직원이 주로 사용하는 곳이니 조용하게 자기 볼 일만 보고 나오면 괜찮아.
-아, 그러면 선생님일 수도 있고 학생일 수도 있는 거구나.
-선생님들이 주로 사용하시니 선생님일 경우가 더 많겠지?
선생님 말에 하나 둘 의견을 모아가던 아이들이 마치 비밀이야기를 속삭이듯 제 귀에 대고 조그맣게 말을 이어갑니다.
-선생님, 그런데 누가 화장실에서 똥을 싸나 봐요. 소리가 진짜 엄청 컸어요.
본인들도 말을 하며 웃겼던지 계속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앙 다문 입술로 막아봅니다. 아! 요놈들이 교직원 화장실 속 똥 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했나 보네요. 누군가의 배변 소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컸나 봅니다. 그게 놀랄 일인가 싶지만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나 봅니다. 그 모습에 선생님도 웃음을 삼키며 한 마디 의견을 남겨봅니다.
-얘들아, 선생님들도 당연히 볼 일을 보지. 선생님이라고 똥 안 싸면 큰일 나는 거야. 화장실에서 그런 소리가 들릴 땐 놀라도 그냥 모르는 척해주는 게 예의야.
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선생님과 아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참아봅니다.
아이들은 중요한 논의를 하듯 머리를 맞대고 자기들끼리 뭔가를 쑥덕거립니다. 긴 토론 끝에 똥 소리의 주인은 분명 선생님들 중 한 명일 거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갑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누군가는 과학시간에 배운 소화기관의 종류를 다시 읊어보고, 누군가는 소화기관 중 항문의 중요성을 뜬금없이 외쳐봅니다.
결국 오늘 토론의 최종 결론은 똥 소리의 주인이 누구라도 선생님 말처럼 예의 있게 모른 척하는 걸로 마무리 지어집니다.
-얘들아, 선생님도 똥을 쌀 수 있으시니깐 우리 모른 척 하자! 그게 예의를 지키는 일이야!
아이들을 보내고 난 뒤에서 심각하게 나눈 아이들의 이야기가 하루 종일 귓가를 맴돌며 마음을 간질입니다. 자기들끼리 내린 결론이 어처구니없지만 참 우리 아이들답다고 느껴집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일상들이 아이들의 호기심 앞에서 예측불가능한 웃음으로 바뀌어갑니다. 내 주변의 사소한 삶의 조각들을 엉뚱한 생각으로 채워주는 아이들 덕분에 선생님 입가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