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앨범 초안이 나왔습니다. 5월에는 공원에서 야외촬영을, 7월에는 학교에서 실내촬영을 진행했었지요. 사진 속 아이들은 5월 짙어져 가는 초록빛을 배경으로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이제 겨우 5개월 남짓 지났을 뿐인데,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훌쩍 커버렸습니다. 5월,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은 지금보다 한창 앳되어 보입니다. 앨범 속 오류를 잡아내기 위해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사진과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사진을 보니 그날이 기억이 선명해집니다.
5월, 그날의 햇살은 생각보다 따갑고 강렬했습니다. 처음으로 교실을 벗어난 아이들은 야외가 주는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해맑게 웃음 지었습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피부가 타 들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들은 깔깔대며 서로를 보고 크게 웃어 댔습니다. 그날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졸업앨범 초안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갑니다.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어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짙푸른 공원이 아닌 텅 빈 교실입니다. 아이들 책상 위로 가을 햇살이 뉘엿뉘엿 저물어갑니다. 항상 정신없이 뭔가가 나귕굴던 책상이었는데, 아이들이 떠나고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을 보니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아직은 이곳이 우리 교실이라는 듯 벽 여기저기 붙어있는 아이들의 흔적이 저를 따스하게 내려다봅니다. 3월 첫날, 하얀 백지 같던 교실이 어느덧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의 흔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마음을 받았던 만큼 내 마음을 열었던 건데, 텅 빈 교실로 감정의 후폭풍이 몰려듭니다. 20년이 넘는 교직생활에도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해마다 교사는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교직 생활이 아니더라도 만남과 이별은 삶을 살아가는 당연한 순리이건만, 올해는 유독 피로감이 몰려듭니다.
저는 이런 감정 소모를 참 싫어합니다. 저는 정든 인연의 헤어짐과 새로운 인연의 만남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시절인연이라는 것을 알기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고, 헤어질 때면 그 순간을 정리해 기억 한 켠으로 갈무리해 왔습니다. 감정을 쏟아내고 마음에 사람을 들이는 순간, 다가올 마지막이 두려워질 테니까요.
상처받는 게 두려워 아이들과 거리를 두었다는 것은 비단 저를 향해 날아올 날카로운 흉기 때문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제가 쏟아낸 시간과 마음만큼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도 저에게는 상처였나 봅니다.
얼마 전 아이들 책에서 읽은 문구 하나가 떠오릅니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일에는 시간의 양이 중요하지 않다.
<오로라를 기다려, 최양선>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선생님과 아이들이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기대도 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 짧은 기간 동안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이 헛되지 않길 바라며, 서로를 통해 단 하나만이라도 무언가를 얻어가길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마음의 양을 조절하지 못했나 봅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짧기에 내가 줄 수 있는 마음의 양이 한정될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이미 쏟아 버린 마음을 더 이상 붙잡을 순 없겠지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마음을 내려놓는 것도 준비해야겠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나눈 마음과 시간의 양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벌써 졸업을 기다리며 새롭게 펼쳐질 중학교 생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설렘과 기대감에 들뜬 내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떠나갈 수 있도록 저 또한 아쉬움 없이 웃으며 보내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