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해 모인 이방인들의 뜨거운 전쟁터, VHS
Der, die, das는커녕, 읽는 법도 몰랐다.
독일 사람들은 왜 'Hello'를 'Hallo'라고 이상하게 발음할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도시라면 영어로 적당히 버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살던 바이에른의 현실은 차가웠다. 그들은 영어를 알아들으면서도 대답은 반드시 독일어로 했다.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특히 관공서에서 행정 업무를 처리할 때면 독일어는 '선택'이 아닌 '생존' 그 자체였다. 독일 특유의 공용어 원칙(Amtssprache)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집 근처 VHS(Volkshochschule, 시민대학)에 일찌감치 수강 신청을 했다. 이곳은 독일 전역에 900개가 넘는 센터를 둔 국가 공인 평생교육원이다. 시와 국가의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사설 어학원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그만큼 등록 절차는 까다롭고 교실 풍경은 낯설었다. 정부 지원을 받는 난민과 이민자들이 뒤섞인 그곳에서, 나는 나이순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마흔의 학생'이 되었다.
내가 마주한 vhs는 우아한 언어 교실은 아니었다.
각자의 삶을 걸고 모인 이방인들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20명의 학생 중 나를 포함한 5명을 제외하곤 모두 터키 친구들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터키어와 독일어가 기묘하게 섞인 소음이 교실을 채웠다. 이미 경제활동을 하고 있거나 수료증이 절실한 이들, 말은 잘하지만 글자를 전혀 모르는 이들, 그리고 정치적 망명으로 인한 묘한 열등감까지 뒤섞인 그들의 기세에 눌려 나는 한동안 벙어리처럼 지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나만의 필살기가 필요했다. 바로 지독한 성실함이었다.
수업 내용을 도저히 못 알아듣겠어서 미리 한국어로 예습해 갔고,
매일 문장을 써가서 선생님께 첨삭을 받았다.
말 잘하는 친구의 표현을 통째로 카피하고,
쉬는 시간마다 미리 정해둔 '타깃 파트너' 곁에서 악착같이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깡마르고 예민한 분이었다. 숙제를 안 해오면 가차 없이 무안을 줬다. 늘 앞자리에 앉아 뒷모습만 보였던 희끗희끗한 머리의 터키 앙카라 출신 의사 선생님에게, "도대체 독일어는 왜 배우고 있느냐"며 냉소를 퍼붓기도 했다. 나는 그 교실에서 민망해지기 싫어 매일 한 시간 넘게 숙제에 매달렸고, 질문을 쥐어짜 냈다. 몇 달이 지나자 선생님은 오히려 나를 먼저 찾으셨다.
"Frau. Lee가 질문이 없으면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입이 터진 결정적인 사건은 뜻밖의 곳에서 터졌다.
한때 한국에서 일했다던 비롤 아저씨가 정치 수업 시간 중 대한민국을 비하하며 열변을 토한 것이다. 북한까지 언급하며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쏟아내는 그의 말에 교실 안 모든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그 순간, 서툰 독일어 뒤에 숨어있던 무언가가 폭발했다. 기분이 나쁘다는 의사를 선생님께 명확히 전달했고,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내가 수강한 인테그라치온 코스(Integrationskurs)는 독일어 수업 600시간과 독일 문화를 배우는 오리엔테이션 100시간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다. 매일 4시간씩 1년을 부대끼다 보면 동지애도 생기지만,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도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생기자 그토록 안 들리던 말이 들리고 막혔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B1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성적표의 점수와 냉혹한 실전 독일어는 전혀 다른 세계였으니까.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성적표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현실의 인사였다. 강의실 밖 이웃들과의 거리는 여전히 아득했다. 낯선 이방인에게는 결코 먼저 안부를 묻지 않는 그들로부터 그 짧은 한마디를 듣기까지, 바이에른의 사계절이 한 바퀴를 넘게 돌아야 했다.
"Wie ge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