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따라 꽃멍 숲멍(가을) | 상사화 꽃무릇 | 영광 불갑사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살다 보니 그러하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인연들을 만난다. 때로는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그 연이 오래 이어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인생은 수많은 인연의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오래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아쉬운 인연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인연이 있기도 하다. 그러니 불교에서도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를 원증회고(怨憎會苦-원수와 만나야만 하는 괴로움)와 함께 인생의 큰 고통이라고 하고 있지 않겠는가?
상사화는 연한 잎이 난초 잎처럼 꼿꼿이 자라다가 잎이 말라버린 후에야 꽃대에 꽃이 피어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다. 보고파 그리워해도 만날 수 없는 아픔을 알기에 사람들은 이 꽃의 이름을 ‘상사화(相思花)’라고 지었을까? 세상을 살면서 만나지 못하고 가슴에만 담아두는 아픈 인연을 사람들은 이 꽃에 투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젊은 스님이 불공을 드리러 온 아름다운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 짝사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스님의 무덤에서 상사화가 피어났다는 전설처럼 연둣빛 꽃대 위에 핀 화려한 꽃이 괜스레 아련하게 느껴진다.
상사화는 주로 7월 말에서 8월에 분홍색이나 노란색으로 핀다. 그런데 전국의 상사화축제들은 주로 9월에 열린다. 엄밀히 말하면 9월에 피는 상사화는 꽃무릇(또는 석산)이다. 넓은 범주의 '상사화 속(Lycoris)'에 속하지만 피는 시기와 색깔이 다른 꽃이다.
꽃무릇은 9월 중하순에 진한 붉은색으로 핀다. 잎과 꽃이 피는 순서도 다르다. 봄에 돋은 잎이 여름에 지고 나서 꽃이 피는 상사화에 비해, 꽃무릇은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돋아 겨울을 난다. 그렇지만 두 꽃 모두 잎이 있을 때 꽃이 없고 꽃이 필 때 잎이 없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점이 같고, 꽃말도 모두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가 우리나라 3대 꽃무릇 군락지로 꼽힌다.
몇 해 전 가을이 오는 길목에 고창 선운사를 찾았다. 선운사의 봄은 동백으로 붉게 물들었다가, 가을은 꽃무릇으로 붉게 물든다. 일주문에 닿기 전에 이미 발아래가 선연한 붉은빛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꽃무릇이 지고 있다. 꽃이 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안쓰럽고, 꽃이 지는 모습은 늘 안타깝다. 꽃무릇은 특히 더 그렇다. 붉은 생기가 빠져나간 꽃무릇은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나비 같다.
그런데 올라가다 보니 길옆을 흐르는 선운천 계곡 중간에 꽃무릇 몇 송이가 아직 활짝 피어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내려온 햇살에 핀 조명을 받은 것처럼 빨간 꽃잎과 시냇물이 반짝인다. 그 몇 송이에 마음을 달랬다. 그 해는 나와 꽃무릇의 인연이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올해는 영광 불갑사(佛甲寺)로 가기로 했다. 올해는 만개한 꽃무릇을 만나기 위해 불갑사 상사화 축제 일정을 확인했다. 제25회 상사화 축제는 올해 9월 26일(금)부터 10월 5일(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27일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일찍 출발했다.
불갑사는 백제 최초의 사찰이라고 한다. 인도 간다라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처음 불교를 전래하여 지어진 곳이다. 불갑사라는 이름도 부처님[佛]의 가르침이 들어와 처음 세워진 으뜸[甲]가는 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보니 불갑사는 붉은 꽃무릇조차도 으뜸인 곳이었다.
마라난타가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처음 발을 디딘 곳이 굴비로 유명한 영광 법성포라고 한다. 그래서 법성포에는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서해바다로 이어지는 갯벌 옆에서 만나는 인도풍의 불상들이 무척 이국적이었다. 서해안의 대표적인 드라이브길인 백수해안도로를 지나 불갑사로 향했다.
불갑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축제를 맞아 전국에서 몰려온 인파로 차량들은 거북이걸음이다. 하지만 그 느린 길이 힘들지 않다. 꽃무릇과의 오늘 인연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을 배경으로 길가에 꽃무릇이 붉게 만개하여 손을 흔들고 있다. 꽃길을 천천히 달린다.
다행히 주차장 빈자리가 있어 차를 세우고 걸어서 절로 향한다.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꽃처럼 밝기만 하다. 불갑사까지 이르는 주위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어 관람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절까지 올라가면서 사진을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 모른다. 절의 마스코트인 상사화를 사랑한 불갑산 호랑이도 곳곳에서 웃으면서 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있다.
붉은빛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사찰이 나온다. 기와지붕 전각들 아래에도 온통 꽃무릇이다. 올라올 때 본 나무 아래 꽃무릇 풍경도 아름다웠지만, 오래된 기와지붕과 붉은 꽃무릇도 너무 잘 어울린다. 절집이 꽃무릇 붉은빛으로 어른거린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절집 분위기에 취한다. 가만히 앉아서 꽃무릇을 내려다본다. 한 송이마다 한 세상이다. 그 가녀린 한 송이에 우주가 담겨있는 듯하다.
천천히 걸어서 내려온다. 여러 갈래 길이 있어 올라올 때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아름답지 않은 길이 없다. 초가집 담장 풍경도 아름답다.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심장병 어린이 돕기로 유명했던 듀오 '수와 진'이다. 몇 해 전 곡성 장미축제장에서도 이 분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인기야 예전과 같지 않지만 열정을 다해 노래 부르는 모습은 여전하다. 몇십 년 동안 선행을 이어가는 모습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마침 그들의 히트곡인 '파초'가 흘러나왔다.
"불꽃처럼 살아야 해... 하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날까지..."
왠지 노래 가사가 이곳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잎과 만나지 못해도 해마다 붉은 꽃을 피워 올리는 꽃무릇도 불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아픈 인연을 품고 꿋꿋이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사화
사랑이 왜 이리 고된가요
이게 맞는가요
나만 이런가요
고운 얼굴 한 번 못 보고서
이리 보낼 수 없는데
사랑이 왜 이리 아픈가요
이게 맞는가요
나만 이런가요
하얀 손 한 번을 못 잡고서
이리 보낼 순 없는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험한 길 위에 어찌하다 오르셨소
내가 가야만 했었던
그 험한 길 위에 그대가 왜 오르셨소
기다리던 봄이 오고 있는데
이리 나를 떠나오
긴긴 겨울이 모두 지났는데
왜 나를 떠나가오
-안예은 작사,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OST(2017)
◉상사화 꽃말: 이룰 수 없는 사랑
◈전국 꽃무릇 명소 떠나가오
- 영광 불갑사
- 함평 용천사
- 고창 선운사
- 울산 대왕암공원
- 하동 송림공원
- 대구 수목원
- 거창 갈계숲
- 김해 활천
- 서울 길상사
- 함양 상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