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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 메밀꽃

계절 따라 꽃멍 숲멍(가을) | 메밀꽃 | 고창 학원농장

by 새벽강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도깨비와 메밀꽃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던 나도 알고 있는 이 명대사. 바로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이다. 극의 내용도 모르면서 OST인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를 들을 처연하고 가슴 시린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방영할 당시에는 보지 않았다. 판타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다. 이 드라마는 가슴에 검이 꽂힌 도깨비가 주인공이라고 한다. 심지어 저승사자와 삼신할머니까지 나오는 판타지 드라마라는 말을 듣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몇 년 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재방송을 잠깐 봤는데,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판타지임에도 스토리에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몰입감을 높여주었다.


주인공들의 두 번째 만남은 해변 방파제였다. 생일을 혼자 우울하게 보내고 있던 지은탁(김고은 役)이 자신도 모른 채 메밀밭에 있던 도깨비(공유 役)를 불러 냈다. 그날 도깨비가 지은탁에게 건네준 메밀꽃 꽃다발. 이 메밀꽃은 드라마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꽃말처럼 두 사람이 '연인'으로 이어질 운명임을 암시하고, 메밀꽃밭은 김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도깨비로 불멸의 삶을 시작한 장소이자, 마침내 두 사람이 결혼하는 장소가 된다.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 되는 운명적 장소인 것이다.

전통 설화에서 도깨비는 메밀을 특히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도깨비가 좋아하는 메밀묵이나 메밀죽 같은 음식을 바치거나 이용해서 도깨비를 부르거나,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니 <도깨비>에서 메밀꽃이 왜 도깨비의 기원과 주인공들의 운명적 사랑의 상징으로 등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꽃밭에 가보고 싶어졌다

드라마를 보고 나니 그 메밀꽃밭에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촬영한 곳이 전북 고창의 학원농장이라고 한다. 학원농장은 '고창 청보리밭'으로 유명해졌고, 지금은 계절마다 꽃잔치가 열리는 곳이다. 청보리가 유명할 때도 가보지 않았는데 여기 메밀꽃밭은 직접 보고 싶었다.

많이 먼 곳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 보니 운전해서 가볼 만한 거리다. 또 놀라운 사실은 학원농장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1990년대에 청보리밭으로 이름나기 한참 전인 1960년대 초반부터 개발되었다고 한다. 메밀꽃 축제 시기에 맞추어 고창으로 향한다.

남고창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지방도를 따라 농장으로 간다. 높은 산이 없는 구릉 들판의 모습이 평화롭다. 푸른 들판 사이 중간중간 보이는 붉은 황토도 반갑다.




도깨비 집까지 맨발로 걷다

드디어 도착! 손 모양 조형물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메밀밭으로 들어간다. 야자수 매트가 깔려있지만 발밑이 쑥쑥 내려간다. 며칠간 비가 계속 와서 땅이 많이 질퍽하다. 매트 있는 구간이 금방 끝나고 흙길이 나온다. 한 발만 더 디뎠다가는 신발째 땅속에 묻힐 것 같다. 돌아서 나오니 친절한 직원분이 맨발로 들어갔다가 발을 씻으면 된다고 알려준다.

수돗가 옆에 신발과 양말을 벗어 두고 다른 길을 통해 메밀밭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맨발이라 야자수 매트가 끝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진흙 속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걸 오히려 즐긴다. 천연 황토 마사지를 하는 셈이다.

맨발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드라마에서 도깨비(공유)가 문을 열고 등장했던 집이다. 나중에 눈 내리는 여기 메밀꽃밭에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정말 허술한 판잣집이지만 넓은 밭 가운데 한 그루 나무와 같이 있어서 운치가 있다. 나도 공유처럼 그 문을 통과해서 드라마의 자취를 사진으로 남긴다.



메밀꽃과 꿀벌

부드러운 S자 곡선처럼 휘어진 길을 따라 언덕 위로도 올라가 본다. 여기도 드라마 <연인>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멋진 포인트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었나 보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기만 하면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다.

다시 휘어진 길을 따라 되돌아 나온다. 나가는 길에 메밀꽃 클로즈업 사진을 찍어 본다. 꽃에 가까이 렌즈를 가져가고서 알게 되었다. 메밀꽃은 그냥 흰꽃이 아니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작고 하얀 꽃들이 가득했는데, 자세히 보니 작은 꽃봉오리들은 분홍색이다. 작은 분홍색 봉오리가 하얀 꽃잎을 틔우고 한 알의 메밀로 익어가는 모양이다.

뭔가 윙윙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아까부터 계속 들렸을 텐데 꽃 사진을 찍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바로 꿀벌이다. 꽃밭에는 벌이 진짜 많다. 이렇게 많은 벌을 동시에 본 적이 있나 싶게 많은 벌들이 날아다닌다. 특별히 벌이 나오게 사진을 찍으려 애쓰지 않아도 사진마다 벌들이 날아들어가 있다. 봄에는 아카시아꽃이 벌들의 낙원이라면, 이 계절에는 메밀꽃이 그들의 맛집인 모양이다. 메밀꽃도 꿀벌이 꿀을 많이 모을 수 있는 매우 우수한 밀원이라고 한다.



웰컴투동막골에서 폭싹 속았수다

밭에서 나와 발을 씻고 학원농장에서 직접 운영하는 카페로 향한다. 가는 길에 만난 간판에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와 드라마가 소개되어 있다. <도깨비> 사진과 함께 가운데에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아이유와 박보검이 서 있다. 내가 <폭싹 속았수다>에 반가워하고 있을 때, 아내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포스터를 보고 반가워하고 있다. 여기서 찍은 영화와 드라마가 많을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무려 50여 편 이상이 촬영되었다.

카페에 들어가서 학원농장의 시그니처 음료를 주문했다. 그리고 판매하는 물건들을 돌아보다가 기념 마그넷 2개를 구입했다. 하나는 드라마 <도깨비>의 배경인 가을의 메밀밭 풍경, 다른 하나는 <폭싹 속았수다> 메인 포스터의 배경인 봄의 유채꽃이다. 아내와 내년 봄에 유채꽃밭도 구경 오기로 약속했다.


분홍빛이 감도는 하얀 메밀꽃, 붕붕 귓가에 아직도 들리는 것 같은 꿀벌 소리, 맨발이 푹푹 빠지던 황톳길, 맛있는 시그니처 음료까지 오감이 즐거운 한나절이었다. 여기에서의 시간이 꿈처럼 행복한 것은 메밀꽃밭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함께 걸어갈 모든 길과

함께 바라볼 모든 풍경과

수줍게 설레게 묻고 답할

모든 질문과 대답들과

그 모든 순간의 당신의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날이 좀 적당해서 하는 말인데

그 모든 첫사랑이 너였어서 하는 말인데

...

이 찬란한 남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신부가 될게요

꼭 그럴게요

-드라마 <도깨비> 대사 중





사랑의 물리학 /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

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문학세계사, 2016)



메밀꽃 꽃말: 연인, 사랑의 약속


전국 메밀꽃 명소 떠나가오

- 고창 보리나라 학원농장 (2025 메밀꽃축제 9.20 ~10.19)

- 평창 봉평 효석문화마을 (2025 효석문화제 9.5 ~ 9.14)

- 영월 삼옥리 (2025 동강 붉은 메밀꽃축제 10.1 ~ 10.19)

- 제주 오라동 메밀밭 / 와흘메밀마을(2025 제주오라 메밀꽃축제 9.13~ )

- 장흥 선학동마을 메밀꽃밭(2025 선학동 메밀꽃 축제 10.3 ~ 10.6)

- 청주 추정리 메밀밭(2025 추정리 메밀꽃 축제 9.25 ~ 10.19)


*이번 주에 방문하시면 대부분의 명소에서 메밀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가님, 독자님,

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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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