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따라 꽃멍 숲멍(겨울) | 대나무 | 기장 아홉산숲
온라인 공간에는 '대나무숲'이 여러 곳 있다. 마음속에 담아둔 비밀이나 고민을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답답함과 억울함을 해소해 주는 온라인 대나무숲의 이름은 아마도 삼국유사 설화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라 경문왕은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귀가 길게 계속 자라나는 것이었다. 왕은 길쭉한 귀를 왕관으로 가리고 지냈다. 그의 비밀은 오로지 왕관을 만드는 사람만 알고 있었다. 왕의 명령으로 그는 절대로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발설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만 두고 지내니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답답했던 그는 아무도 없는 대나무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그런데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서양의 신화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차이점은 대나무숲이 아니라 우물이다. 우물에 귀금속이나 값진 물건을 던지고 마음속 깊이 품은 소망이나 간절한 기원을 빌었다. 깊은 물속에 잠긴 소원은 쉽게 발설되거나 외부로 유출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대나무숲과 우물은 공개적으로 발설하기 어려운 개인의 비밀이나 사적인 문제를 해소하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대나무숲이 아무도 오가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빽빽한 대나무숲 속을 걸어보면 외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대나무숲은 바람과도 잘 어울린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 다른 숲과는 다른 소리가 난다. 마치 바람이 부는 피리 소리 같다. 울산 십리대밭이나 담양 죽녹원을 걸어보면 사철 초록의 대나무숲은 늘 신비롭다.
"여보, 주말에 출장 같이 갈래?"
초겨울 주말에 부산 출장이 생겼다. 오전에 끝나는 일정이다. 오후에 같이 부산 여행을 하고 오자며 아내에게 동행을 권했다. 별다른 일이 없는 날이라 아내는 흔쾌히 따라나선다.
점심 무렵에 출장 일정이 끝났다.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던 아내와 만나 차에 올랐다.
"어디 가고 싶어?"
"바로 생각나는 곳이 없네. 용궁사도 좋고, 해운대도 괜찮고."
"당신이 안 가본 곳에 가보자. 아홉산숲 어때? 대나무 숲 속을 걸을 수 있는 곳이야."
"그런 곳이 있었어? 좋아."
오늘은 조용한 대숲 속의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간다. 바로 기장 아홉산숲이다. 아홉산숲은 기장 아홉산 자락에 남평 문씨 가문에서 무려 400여 년을 가꾸어온 사유림이다. 일제 강점기에 수탈을 피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기울인 결과 지금의 숲으로 이어졌다. '아홉산숲'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한 지는 이제 10년 정도 되었다.
복잡한 시가지를 벗어나 기장철마 나들목으로 향한다. 얼마 지나 아홉산숲 이정표가 보인다. 입구 바위에 내가 좋아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체로 '아홉산숲'이라고 새겨져 있다. 아마도 집자(集字)한 모양이다. 아담한 매표소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 관람 코스가 몇 갈래로 갈라져 있지만 전체를 돌아보기 위해 왼편으로 크게 돌면서 걷는다.
탐방로에 햇살이 나무 사이사이로 내려온다. 아내와 지난 한 주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왠지는 모르지만 산책할 때 소통이 더 잘 된다. 대나무와 아직 남은 단풍이 어우러진 산책로를 돌아가면 아름드리 큰 소나무들이 있다. 소나무 아래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작은 돌탑을 쌓아두었다.
곧이어 첫 번째 대나무숲이 나온다. 아내가 대나무 굵기에 놀란다. 이 굵은 대나무는 가장 크고 굵게 자라는 맹종죽이라고 한다. 당간지주가 있는 대나무숲에서는 중년 부부들이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영화 촬영지라고 한다. 우리는 근처 벤치에 잠시 앉았다. 두런두런 대화를 계속 나누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른다.
왼쪽으로 크게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이제 내리막길이다. 거기에는 편백나무숲이 있다. 편백은 천천히 자라는 '대기만성형' 나무다. 그런데 이렇게 쭉쭉 곧게 자란 편백나무는 얼마나 긴 시간을 지나온 걸까? 오랜 인내의 시간을 거친 만큼 더 단단하고 우수한 목재가 되고, 풍부한 피톤치드를 내뿜는 숲이 된다. 편백나무 표면에서도 혹시 좋은 향기가 나는지 코를 가까이해 본다. 기대한 편백 향기는 나지 않지만, 새소리를 들으며 편백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다시 올라간다.
드디어 아홉산숲의 하이라이트인 두 번째 대나무숲이 나온다. 앞의 대나무숲보다 규모가 크다. 빽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 인상적이다. 유명 대나무 명소에는 탐방로를 따라 낮은 울타리가 있지만 여기는 없다. 그냥 오솔길 바로 옆에 큰 대나무들이 서있다. 울타리도 없으니 대나무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쭉쭉 곧게 뻗은 대나무는 반듯하고, 숲은 청명하고 고요하다. 겨울이지만 나무와 잎은 푸르다.
"저기 앉을까?"
대나무 숲길을 내려가다 보면 나무 벤치가 나온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아 본다. 바람이 대나무 꼭대기 높이 댓잎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사라락사라락' 들린다. 조용한 듯 하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더 다양한 소리가 들린다. 초록 공간 속에 아무도 보이지 않고, 바깥소리 조차 들리지 않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한번 외쳐도 될 듯하다. 단체로 온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고요한 대숲 아래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내가 살짝 춥고 허기가 느껴진다고 해서 일어선다. 대나무숲을 돌아 나온다.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다. 청명검을 두고 대나무 위에서 무림 고수가 싸우는 장면이 인상적이던 <와호장룡> 영화가 떠오른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한석규 배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던 예전 통신사 광고 속 대나무 숲 속으로 다녀온 느낌도 든다.
나가는 길에는 숲을 병풍처럼 두른 한옥 한 채가 나온다. 고사리조차 귀하게 본다는 의미를 담은 집, 관미헌(觀薇軒)이다. 아홉산숲을 400년 넘게 가꿔온 남평 문씨 가문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신을 담은 이름이라고 한다.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뒷산의 나무로만 지어졌다고 한다. 뜰에는 100년 전 경북 칠곡으로 신행을 다녀오면서 얻어온 은행 열매를 심어 싹을 틔웠다는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이 집에서 문씨 가문은 대대로 숲을 지켜왔을 것이다.
아홉산숲에서 바람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들으며, 속을 비운 대나무의 맑은 기운을 안고 돌아 나온다.
대나무 / 김훤구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찾아
바람따라 갔다가
자기에게 모든 것이 다 있음을 알고
제자리로 돌아와
속 비우고 곧게 산다
-김훤구, <삐그덕>(한맥문학출판부, 2017)
◉대나무 꽃말: 지조, 인내, 정절
◈전국 대나무 명소
- 담양 죽녹원
- 울산 십리대밭
- 강릉 오죽헌
- 부산 아홉산숲
- 대구 죽곡댓잎소리길
- 고령 개실마을대나무숲
- 보령 오서산자연휴양림대나무숲
- 구례 섬진강 대나무숲길
작가님, 독자님,
대나무숲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