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따라 꽃멍 숲멍 | 자작나무 |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날고 싶은 자작나무
자작나무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학창 시절 공책 표지의 저 문구(文句) 덕분이다. '날고 싶은 자작나무'는 문구(文具) 브랜드이기도 했다. 그 당시 ‘바른손’, ‘모닝글로리’라는 다른 문구 이름도 좋았지만, ‘날고 싶은 자작나무’라니! 참 문학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날고 싶어 하는 저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지리 시간에 선생님께서 순백의 이국적인 나무라고 설명해 주셨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꼿꼿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나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다 보면 며칠 내내 창밖으로 하얀 자작나무 숲만 보일 정도라고 한다. 한반도에는 개마고원과 백두산 등 북부 산간지역에 주로 서식한다. 하얀 나무껍질에는 기름 성분이 많아 불에 태울 때 나는 '자작자작' 소리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내 머릿속엔 그저 설원에 서 있는 하얀 나무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서울 여행을 마치고 집이 아닌 설악산으로 향했다. 눈 덮인 울산바위 사진 한 장이 우리를 겨울 설악으로 이끈 것이다. 소양강댐 아래에서 닭갈비를 먹고 미시령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인제를 지날 무렵 ‘원대리 자작나무숲’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 우리나라에도 자작나무숲이 있었구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조금씩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던 터라 도로 상황이 걱정되었다. 그 무렵 터널이 막 개통되어 미시령을 지나기는 어렵지 않으나, 초행길에 눈까지 내리니 외설악 숙소까지 가는 길이 못내 염려되었다.
하지만 자작나무숲에 대한 호기심이 눈길 걱정보다 조금 더 컸다. 오른쪽 길로 살짝 빠져 고개를 넘어가니 원대리 자작나무숲 주차장이 나왔다. 그리 넓지 않은 주차장이지만, 눈이 내린 탓인지 다행히 빈자리가 남아있다. 차에서 내리면 숲이 바로 나올 줄 알았는데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했다. 겨울 산에 오를 준비도 미처 못하고 임도를 걷기 시작했다. 길은 예상보다 멀었다. 설상가상으로 눈이 함박눈으로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다. 언제 도착하냐고 우리 아이들이 묻는다.
“거의 다 왔어요”
내려오는 분들의 '하얀 거짓말'에 용기를 얻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자 더 거짓말 같은 순백의 세상이 펼쳐진다. 흰 눈 사이에 자작나무들이 은빛 줄기를 뽐내며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라는 나무 팻말을 따라 숲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여전히 숲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마치 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들어온 듯하다. 한 그루만 있어도 아름다운 자작나무가 숲을 이룬 모습은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풍경이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실제가 아니라 그림 속 같다. 온통 흰색과 회색뿐인 무채색 세상 속으로,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패딩 원색이 움직인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흰 눈을 맞으며 마치 바람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숲의 이름도 이해가 되고, 순백의 하얀 나무를 보며 왜 '숲의 귀족'이라 불리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작나무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숲을 내려왔다. 길에 쌓인 눈 때문에 숙소에는 어둑어둑해져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자작나무 숲에 간 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미지의 순백 세계로 다녀왔던 꿈결 같은 그날.
백화 /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山)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山) 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 지음 이동순 편, 『백석 시 전집』(창작과 비평사, 1988)
◉자작나무 꽃말: 당신을 기다립니다, 순결, 청순
◈전국 자작나무 명소
- 인제 원대리자작나무숲
- 영양자작나무숲 (죽파리)
- 정선자작나무숲 (덕암리)
- 국립김천치유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