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의 경계자들
연구실 가득히 쌓인 서류더미와 세계 지도를 배경 가운데, 오래된 가죽 소파에 앉은 베네딕트 교수가 그에게 말했다. 그의 어투는 부드럽지만 냉정하게 느껴졌다.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도, 관계도 가끔씩은 존재한단다. 어떤 것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도 이유조차 찾기 쉽지 않곤 하지.”
끝부분이 다 닳아버린 파이프가 천천히 미지근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교수는 입가 주변에 희미한 미소를 지닌 채, 수염 사이로 와이어트를 바라보았다.
“자네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이 나는군. 남들 틈에서 늘 한 걸음 거리를 두던 아이였어. 낯선 장소에도 어색하지 않게 앉는 법을 알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어딘가 이방인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같았지."
와이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베네딕트 교수를 응시했다. 그의 눈은 꽤나 지쳐 보였다.
“어느 날 내가 '문화란 무엇일까?'라고 묻자, 자네는 조용히 이렇게 답했지. '조금씩 다르게 살아남는 법' 그 말은 참 오래 마음에 남더군."
베네딕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흐린 유리에 쓸려내려간 비 자국이 마치 오래된 글씨처럼 남아 있었다
“자네의 태도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면 교실 공기가 변했네. 낯선 지역 얘기를 할 때도, 자네는 결코 역사나 사실만을 말하지 않았지. 그 속에 '살았던 사람의 마음'을, 아주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얹어두었으니까. 그것이 와이어트 군 장점이자 동시에 학자로서 치명적인 약점이겠지.”
그의 파이프가 다시 한번 연기를 내뱉었다. 와이어트는 그가 내뿜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실눈을 뜬 듯, 뿌연 안개가 그의 시선을 가득 채웠다.
잠에서 깬 와이어트는 다시 눈앞에 놓인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17시간. 그는 짧은 한숨과 신음을 내뱉었다. 옆자리의 여성도 막 잠에서 깼는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벌써 세 시간이 흘렀네요! 요새 피곤해서 그런가, 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로 잠에 곯아떨어져버렸어요.”
여성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꺼낸 무언가를 수줍게 와이어트에 건네주었다. 사탕이었다. 와이어트는 조그만 포장지 위에 야자수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희 동생이 자주 보내줘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좋아한 건데, 한 번 드셔 보세요.”
달콤한 맛이 그의 입 안에 퍼지자, 그는 오랜만에 잊고 있던 새로운 감각이 살아나는 듯했다. 와이어트가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건네면서 말했다.
“저는 사실 파푸아에 갑니다.”
“예?” 예기치 못한 발언에 여성은 당황한 듯 보였다.
“파푸아… 거길 왜 가죠?” 여성의 눈이 한층 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명목상은 취재하러요.”
“명목상…이요?” 여성이 흥미로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답을 찾으러 가는 중이에요. 저는 파푸아의 독립투쟁에 관해서 논문을 쓰고 있거든요.”
여성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낸 뒤 자신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음미하듯 입 안에서 오물거렸다. 이내 다시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죠? 왜 파푸아죠? 죄송해요, 무례했다면요…”
여성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와이어트는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은 뒤 한 종이봉투를 꺼내 보였다.
그 안에 봉투 안에는 종이편지 한 장이 각 잡혀 들어있었다. 와이어트는 그 편지를 펼치고, 여성과 함께 바라보았다.
『”여러분, 우리가 첫 발을 내딛는 곳은, 익숙함이 아닌 낯섦입니다. 말레이 세계는 수많은 삶과 이야기가 뒤엉켜 흐르는 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밟아온 땅과는 다른 흙을 딛고, 우리가 쓰는 말과는 다른 언어로 서로를 부릅니다. 조개껍질에 깃든 영혼을 믿는 이도 있고, 밤하늘의 별자리에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요. 이슬람의 신을 섬기면서도, 오래된 숲의 신령을 잊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조상을 미라로 모셔두고, 그 곁에서 삶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을 먹고,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와 정치를 꾸려가는 이들이 바로 우리가 만날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문화, 그들의 신념, 그들의 일상은 우리에게 낯설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낯섦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잣대를 들이대어 그들을 재단하거나, 문명화 혹은 서구화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삶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과 시각이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지역학도의 길은, 나와 다른 세계를 만나는 길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길에서 내딛는 첫걸음입니다.”
베네딕트 교수님. 당신의 말이 저의 귓속에 고고히 울려 퍼졌습니다. 그동안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미래가, 갑자기 또렷한 형상을 갖추고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는 벅찬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삼켜버릴 듯한 강렬한 희망이 저의 심장을 두드렸죠. 제가 나아갈 길이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도망자처럼 숨었던 스스로가 조금 더 나은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평범하게만 여겨졌던 그곳은 새로운 의미로 빛나기 시작했고,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조차,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조차 저에게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의 이정표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했던 불안과 망설임은, 이제는 설렘과 용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진정으로 지역학도가 되고 싶다 결심한 순간이었습니다.
촛불. 파푸아에 대한 당신의 비유였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자신의 터전들을 빼앗긴 파푸아 인들은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뜨겁지는 않지만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꾸준하게 수십 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열망한다 말씀하셨죠. 당신의 말은 저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렇게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작은 불씨를 발견했습니다. 그 불씨는 아직 작고 연약했지만, 세상의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믿음으로 저를 가득 채웠습니다.
만약 정답이란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별이라면, 그 별을 좇는 여정이 고통이 아니라 갈망일 수는 없을까요. 우리는 관찰자로서,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캐묻는 자라고 하셨죠. 이 말을 들은 뒤로부터 한 번도 이에 대해 거부하거나 반항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가진 사회적 약속과 관점을 번역해야 한다.’ 당신의 말 이후, 그들의 터전은 저에겐 일종의 우주같이 느껴졌습니다.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으로 행성 밖의 우주를 관찰하듯, 저 역시도 그들의 우주를 관찰하는 듯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우주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불빛을 뿜는지. 그 원동력이 과연 무엇에 기인하는지.
존경하는 베네딕트 교수님. 여러 번의 물음 끝에, 저는 진심을 고백하겠습니다. 도저히 답을 찾지 못하겠다고. 분명히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말하고 싶습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도 가끔씩은 존재하더라고.’ 교수님의 말은 저를 아프게 만듭니다. 불쌍한 당신의 제자의 요청을 고까워 여기지 말아주시길 바라면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