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생각했다. 단어 하나가 가진 무게에 대해. 사랑이라는 세 글자, 희망이라는 두 글자.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하게 될까. 그건 꽤나 멋진, 아니, 끔찍한 상상 속의 유희였다. 그러다 진짜로 그 일이 벌어졌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실점’ 연구소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다. 내가 이름을 지은 곳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지점, 우주의 블랙홀처럼. 음, 그때는 그저 멋을 부린 이름이었다. 정말로 소실점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지. 첫 번째 단어가 사라진 건 폰트 문제인 줄 알았다. 논문 스크롤을 내리다, '존재론적'이라는 단어가 텅 비어 있었다. 빈 공간.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점이 찍힌 것처럼. 폰트 깨짐인가 싶어 새로고침을 눌러봤지만, 여전히 그 단어만 사라진 채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 눈을 의심하기보단 컴퓨터 오류를 의심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기현상은 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내 눈앞에서 친구와 주고받던 메시지의 '안녕'이라는 단어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봤다. 마치 모래로 만든 성처럼, 작은 입자로 흩어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실되는 단어의 속도는 빨라졌다. 처음에는 특정 단어들만 골라 사라지더니, 그다음에는 문장 단위로, 그리고는 아예 의미 덩어리째 증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다음에는 분노했고, 마지막으로는 침묵했다. 더 이상 소통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논문에서 '단어 소멸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참으로 비과학적인 작명이었지만,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하지만 그 단어마저도 곧 사라졌다.
나는 언어학자였다. 나는 내 존재를 단어로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어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 공포는, 음,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공포’라는 단어도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은, 내가 읽었던 모든 책은, 심지어 내 머릿...속의 생각들도 단어라는 뼈대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내 기억은 백지가 되어갔다.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이 흐릿해지고,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이 입술 위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강민우인데, ‘강민우’라는 단어는 곧 사라질 테니까.
나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내 방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그 책들은 그저 종이 뭉치에 불과했다. 나는 펜을 들고,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존재한다'라는 단어의 획들이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나는 무너졌다. 내 발밑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이 교수님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언어는 인간의 오만함이 만들어낸 오류라고.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되찾는 과정이라고.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광경을 보면... 어쩌면 그분의 말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펜을 떨어뜨렸다. 펜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침묵으로 가득 찬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나는,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그저 서 있었다.
내 앞에 놓인 책상 위, 내가 늘 사용하던 메모지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며칠 전,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갔던 단어였다.
‘마지막’
그리고 그 단어는, 어떤 이유에선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