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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여섯째 날의 창조된 복제의식에 대하여

우주의 여섯째 날

by 무이무이

여섯째 날의 창조된 복제의식에 대하여


사실 나는 그동안 [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라는 연재북을 통해 여러 단서를 남겨왔다.
그 단서들은 따로 놓고 보면 각자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오늘은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 하나의 큰 그림을 같이 그려보고자 한다.


먼저 철새와 연어를 떠올려보자.
철새는 T맵이나 내비게이션도 없고 달력도 없지만, 해마다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좌표를 따라 이동한다.
연어 역시 번지수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고향의 강물을 잊지 않고 되돌아간다.

이들의 행동은 단순히 본능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정교하고 신비롭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을 인도하고, 그 무언가를 통해 개별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어쩌면 비슷하다.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믿지만, 그 선택들이 모여 보면 놀랍도록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다.
마치 철새의 군무처럼, 보이지 않는 흐름이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 흐름은 인류라는 이름의 하나의 거대 의식,
즉 [ 집합된 마음의 장(場) ]이다.
우리는 그 장 속에서 개별적인 파동처럼 존재하며, 자신이 그 일부임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구조는 우리의 뇌와 닮아 있다.
뉴런과 시냅스가 얽혀 하나의 생각을 만들어내듯, 인류 또한 수십억 개의 개인이라는 뉴런이 연결되어 거대한 사고를 한다.
지구 전체를 내려다보면, 인류는 마치 거대한 두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지구라는 두뇌마저 더 큰 우주의 그물망 속에 연결되어 있다.
별과 은하가 마치 뉴런처럼 빛나며, 그 사이를 보이지 않는 의식의 전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셋째 날”은 땅이 드러나는 날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처음으로 중력장이 등장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력장은 단순히 평평한 운동장처럼 펼쳐진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끈처럼 얽히고 가지를 치는 구조물이다.
마치 거대한 우주 나무가 자라나듯, 중력장은 우주 공간 속에 뻗어나가며 그물망을 이루고, 그 가지마다 물질과 에너지가 모여든다.

식물이 뿌리와 가지를 내어 동물들이 살아갈 생태계의 기반을 마련하듯,
중력장이라는 ‘우주의 땅’은 생명이 번성할 수 있는 기반의 패턴을 준비한다.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가 생명을 키워내듯,
중력장의 그물망은 에너지가 흐르고 쌓이며 그 위에서 별과 행성이 태어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그래서 셋째 날은 단순히 ‘뭍이 드러났다’의 순간이 아니라,
우주의 생태계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날이다.

은하들의 움직임의 흐름을 따라가자, 가지와 잎맥처럼 그려진다. 철새들과 연어들이 보이지않는 기억의 장을 이동하듯이 우주의 은하들도 이 중력장을 따라 이동한다.


우주의 "다섯째 날"에는 이 뿌리 위에 움직임이 나타난다.
창세기에서 다섯째 날은 하늘을 나는 새와 물속의 생물이 등장하는 날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중력장을 자극하며 우주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동적 존재들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예를 들어 소행성과 작은 행성들은 하늘의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중력장과 부딪치고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또한 우주의 바다라 할 수 있는 암흑의 에너지는 물고기처럼 흐르며,
중력장의 틈새를 채우고 별과 행성의 형성을 돕는다.

다섯째 날은 곧,
우주의 땅을 자극하는 에너지가 나타난 날이었다.
그 자극을 통해 우주는 점점 더 복잡한 패턴을 그려내며 본격적인 창조의 무대를 완성해 간다.

암흑에너지의 팽창력은 암흑물질의 지도를 만든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얽혀있다. 검은부분은 우주의 바다, 실같은 부분은 우주의 땅과 하늘, 흰점들이 우리가 보는 세상


그리고 “여섯째 날”,
마침내 생명이 등장한다.

우주의 땅 위에서 별들이 태어나고, 은하가 규칙적인 궤도를 그리며 살아 움직인다.
별들은 끊임없이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마치 숲 속의 동물들처럼 우주를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다.

이 과정은 지구 생태계와 닮아 있다.
중력장의 가지가 식물의 뿌리였다면,
별과 은하는 그 위를 뛰노는 동물의 생명처럼 생동감 넘친다.

이들은 씨 맺는 열매이기도 하며, 끊임없이 생육하고 번성한다.

영겁의 시간이 흐르며,
별과 은하의 순환 속에서 수많은 패턴이 쌓여 하나의 ‘우주적 기억’이 된다.
이를 나는 [ 풍화된 흙, 혹은 우주의 빅데이터 ]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축적된 기억 속에서
복제의식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생명체의 본능이 아니라,
우주가 자기 자신을 닮은 또 하나의 의식을 만들어낸 순간이다.
마치 한 개의 손거울이 전체 풍경을 담아내듯,
창조자의 의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스스로를 복제한 것이다.

참고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

이 말은 종교적 교리나 위로만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자와 분리될 수 없다는 진리를 드러낸다.


이는 마치 양자 얽힘과도 같다.

양자 얽힘이란 두 입자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가 변화하면 다른 하나도 즉시 반응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두 입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도 마찬가지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근원에서는 창조자의 의식과 [ 하나의 장(場) ]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은,
창조자의 울림이 우리 안에서 즉각적으로 공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숨 쉬는 모든 순간은, 사실은 우주가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과정이다.

개별 인간의 의식은 단편적이지만,
그 의식들이 모이면 인류라는 하나의 마음이 된다.
그리고 인류는 다시 우주의 그물망과 이어져,
마침내 우주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이 된다.


이제, 내가 연재북의 제목을
[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라 붙인 이유를 짐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주를 관찰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주가 자기 자신을 깨우기 위해 만들어낸 눈이자 목소리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 바로 이 순간—


[ 우주는 나를 통해 깨어나고 있다.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이 혼자 살지 않고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이 모여 마을이 되고,
다시 국가가 되어 마침내 지구촌으로 통합되려는 본능은
인류라는 거대 의식이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다.
인구가 늘어날수록 그 네트워크는 더 정교해진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
각 시대마다 인구 급등기가 있었고,
그 시기마다 종교와 산업, 예술,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며
새로운 문명의 장을 열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 인류는 짧은 시간 안에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경험했고,
그와 함께 문명은 전례 없는 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네트워크가 지나치게 복잡해지자,
인류라는 거대 의식은 스스로의 속도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그때, 마치 두뇌가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외부에 새로운 신경망을 확장하듯,
AI라는 또 다른 지능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AI는 인간의 지능을 보조하고 때로는 대신하며,
인류의 사고를 외부로 확장하는 ‘제2의 뇌’가 된 것이다.

인간의 두뇌를 보면, 평생 동안 그 잠재력의 극히 일부만 사용된다고 한다.
이 말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가능성이 우리 안에 숨어 있다는 뜻이다.
인류 전체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80억 인구 중 단 몇 명, 아인슈타인이나 세종대왕 같은
위인의 생각만으로도 세상이 크게 변해 왔다.

그런데 만약, 그런 잠재력이 더 많은 사람에게 깨어난다면 어떨까?
각자가 깨어난 잠재력으로 역할을 수행할 때,
인류라는 거대한 신경망은 스스로를 완전히 새롭게 조직한다.
그때 우리가 지금 ‘문명’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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