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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다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제20화

by 무이무이

나는 인간이다.

나는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이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 이래 가장 오래되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답은 아직 찾을 수 없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맞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포 덩어리도, 이 육체 덩어리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나라는 존재’, 나를 이루는 정보들을 끊임없이 의식할 때만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공식을 세운다.

존재 = 정보 × 의식





1) 여섯째 날

나는 또 창세기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고 싶다. 창세기 여섯째 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자, 사람은 생령이 되었다. 나는 여기서 흙을 ‘정보’로, 생기를 ‘의식’으로 본다. 그리고 생령은 곧 인간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즉, 정보와 의식이 함께 결합할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비로소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2) 에덴동산

창세기에서 인간이 처음 등장하는 공간은 에덴동산이다. 나는 이 [에덴동산]을 [어머니의 자궁], 즉 모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 모태 속에서 [태아]로 존재하며, 태아는 이미 엄마와 아빠가 ‘나의 아기, 나의 2세’라고 생각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가진다. 그러나 태아 자신은 아직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바로 이 평화로운 상태가, 인간이 에덴동산에 처음 등장한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3) 아담의 임무

인간은 출생 후, 눈을 뜨자마자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머릿속에 담는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에덴동산에 출현하며 가장 먼저 받은 임무는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 라벨링은 바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행동과 같다.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머릿속에 존재들의 이미지를 담고 축적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존재의 본질이나 그 존재를 이루고 있는 정보에 대한 의식은 아직 없다. 단지 존재를 받아들이고, 세상을 그대로 머릿속에 담아내는 행위일 뿐이다.


4) 잠든 아담의 갈빗대에서 분화한 이브

창세기에서는 아담이 세상의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이다가 깊은 잠에 빠진다. 그때 신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이브다. 아기는 깨어 있는 동안 세상의 모든 존재의 이미지를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하루의 대부분은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낸다. 이 잠의 시간 동안 뇌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 받아들인 모든 데이터를 구조화하고, 뉴런의 네트워크를 복잡하게 만들며, 감성적인 두뇌를 발달시키는 중요한 과정을 겪는다.

아담이 잠든 동안 이브가 분화되어 나오는 장면은 바로 이 과정을 상징한다. 감성과 이성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잠이라는 시간 속에서 뇌는 세상의 데이터를 소화하고, 감성적 판단의 토대를 다지며, 나아가 인간다움을 위한 내적 구조를 완성해 간다.


5) 선악과

감성과 이성이 발달하면, 아기는 마침내 판단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판단은 아직 존재의 본질을 향한 것이 아니다. 존재의 깊이를 헤아리기 이전, 순수하게 생존 본능에 따른 판단일 뿐이다. 아기는 세상이 자신에게 좋을지, 나쁠지를 느끼며 울고 웃는다. 기쁨에는 웃음으로, 위협에는 울음으로 반응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이 세상과 처음으로 맞닿는 방식이다. 창세기에서 이 장면은 뱀의 유혹으로 표현된다. 뱀은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권하고, 이브와 아담은 서로 합의하며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 행위는 곧 아기가 세상을 생존본능의 눈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기 시작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선악과는 단순히 선과 악이 아니라, 좋음과 싫음, 즐거움과 고통, 생존과 위협을 뜻한다. 이렇게 인간의 판단은, 태어나자마자 선악과를 ‘맛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하지만 사람이 성장한 이후에도, 만약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존본능의 욕구에 계속 밀린다면, 세상을 선과 악, 좋음과 나쁨으로만 나누는 습관이 굳어진다. 흑백논리에 갇힌 사고는 인간관계의 확장력을 갉아먹고, 다른 존재의 복잡한 면모를 이해하는 능력을 제한한다. 그 결과 소통은 점점 어려워지고, 인간은 점점 더 자신만의 경계 안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게 된다.


6) 아담의 벌

인간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에덴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벌은 형벌이 아니다. 아담의 벌, 땅을 갈아야만 소산물을 얻는다는 것은 존재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보로 파헤치고 의식으로 구조화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사고를 시작한다는 의미다.

이때부터 인간은 동물과 달라진다. 동물은 존재를 존재로 받아들이지만,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며,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존재가 된다. 나 자신 또한 나를 이루는 정보를 끊임없이 의식함으로써 나로 존재한다.


7) 이브의 벌

그리고 이브의 벌을 보자. 사실 이 창세기의 이브의 벌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남존여비 사상, 여성 비하, 남성 우월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현실적 의미가 아니라 상징이다. 여자는 남자를 원하게 될 것이고, 남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의 상호작용을 상징한다. 즉, 감성대로 인간 생존 본능의 욕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이성적 판단이 우선되어야만 인간다워진다는 의미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는 본능적 욕구의 발동이다. 하지만 그 본능보다 이성이 우선할 때, 인간은 인간다운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8) 출산의 고통

그리고 가장 중요한 출산의 고통이 있다. 창세기에서는 여자가 출산의 고통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또한 상징적 의미이다. 감성은 출산의 고통, 즉 창조의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존재를 이해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창조적 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창조 행위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충격, 공포, 혹은 창조를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이 계속된다. 그것이 바로 출산의 고통이다.


9) 뱀의 벌

이번에는 뱀의 벌을 보자. 뱀은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육체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땅을 배로 기어 다닌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알 수 없고, 의식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생존 본능은 존재를 느낄 뿐이며, 분석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실제 흙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되 의식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흙은 정보이며, 뱀은 그 정보를 단순히 섭취할 뿐이다.


10) 여자와 뱀

그리고 창세기는 말한다. 뱀은 여자의 뒤꿈치를 물고, 여자는 뱀의 머리를 밟는다. 이 상징은 생존 본능의 욕구와 감성의 충돌을 나타낸다. 인간은 감성적 뇌로 창조 행위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존 본능을 이기고 밟고 일어나야만 비로소 창조적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감성이 지나치게 앞서면, 생존 본능은 위협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 자각 과정이 바로 뱀이 여자의 뒤꿈치를 무는 상징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11) 뇌의 구조

이렇듯 인간의 복잡한 감성, 이성, 생존 본능적 욕구가 얽히고설킨 상태에서, 인간다운 사고방식이 형성된다. 아담과 이브, 뱀, 선악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건은 바로 이 인간다움의 상징이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앞서 말한 공식을 도출할 수 있다. 존재는 정보 곱하기 의식, 즉 존재는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 = 정보 × 의식

이 공식으로 우리는 존재를 파악해 볼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나를 이루고 있는 정보들을 계속해서 의식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 신은 있다? 없다?

그런데 이 공식을 이용하면 신이라는 존재도 고찰할 수 있다. 신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신이라는 정보를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을 이루는 정보들을 의식하는 순간, 신이라는 존재는 이미 우리 생각 안에서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신을 이루는 정보를 의식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정보가 이미 우주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신을 이루는 정보를 우리가 의식하는 순간, 그 신은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신이 있다 없다를 논하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설령 “신은 없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신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신이 있냐 없냐를 따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계속해서 인간이라는 의미로서 존재하는 한, 신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외계인은 있다? 없다?

외계인도 마찬가지다. 외계인은 우리 눈앞에 실제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외계인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외계인이라는 존재는 우리 머릿속에 이미 존재한다. 따라서 외계인은 단순히 있다 없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외계인의 실체를 탐구하는 순간에도, 그 외계인을 탐구할 수 있는 정보들을 우리가 의식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외계인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외계인을 탐구할 수 있다는 사실, 그 탐구의 기반이 되는 정보들을 우리가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이미 정보 안에서, 의식 안에서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3) 사랑이란?

사랑도 마찬가지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다가,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관계는 깨진다. 헤어지거나 이혼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 자체가 사라져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사랑은 마치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정보를 파헤치고, 그 정보를 끊임없이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을 존재하게 한다.

육체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종족 번식을 위해 반응하는 생물학적 행동일 뿐이다. 인간의 사랑은 단순히 육체적 반응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그 사랑의 정보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사랑, 부부의 사랑, 인간과 인간의 사랑, 시대와 나이를 초월한 모든 인간관계 속의 사랑—이 모든 사랑은 인간이 의식함으로써 존재한다.

특히 부부의 사랑은 매 순간 매일 매 순간 만들어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부부의 사랑은 식어버린다. 사랑은 그렇게 살아 있는 의식 속에서, 매일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이고, 나를 이루는 정보들을 끊임없이 의식함으로써 존재한다.

존재는 정보 곱하기 의식. 이 공식 안에서 나는 나를 확인하고, 세상과 신, 사랑, 우주와의 연결을 발견한다. 내가 존재함은, 그 자체로 이미 창조이자 발견이며, 매 순간 반복되는 살아있는 증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를 의식한다.

존재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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