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때 제18화.
창세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대홍수 이후, 마른 땅위에 사람들은 도처에 번성했다.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위해 슈나르 평원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뜻을 같이하기 어렵지 않았다. — 같은 언어로 대화했고, 같은 설계도를 그렸으며, 같은 방식으로 벽돌을 찍어냈다. 목표는 단순했다.
“우리가 탑을 쌓아 흩어지지말고 하나의 시스템으로 강력히 결속시켜, 우리의 존재를 영원히 지키며 첨단 문명을 이룩하자."
그때부터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설계도, 하나의 논리, 하나의 신앙, 하나의 이론만을 허용했다. 다른 길은 허용되지 않았다. 혹시 더 나은 방법이 있다 해도, 탑이 흔들릴까 두려워 말 꺼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냈고, 다른 목소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탑은 자라났다. 높아질수록 더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고, 더 창의적인 발상과 혁신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발상은 처음부터 차단되었다. 하나의 틀 안에서만 작동하도록 조직된 시스템은 스스로의 한계를 감지하지 못했다.
반대로 움직이거나 다른 길을 모색하려 한 선구자와 혁명가들은 하나둘 탑 아래로 던져졌다. 세월이 흐르며 그 자리는 선구자들의 피와 혁명가들의 시신으로 점점 높아졌다. 벽돌은 피와 진흙을 바른 채 차곡차곡 쌓여 올라갔다. 탑은 웅장했지만 속은 점점 공허해졌다. 더 이상 위로 오를 방법을 찾지 못했다. 피묻은 벽돌을 손에 든 채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더 이상 탑을 쌓을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한때는 단일한 언어와 이론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새로운 길을 내야 할 때, 새로운 기술과 시선이 필요할 때, 입을 막고 귀를 닫은 탓에 아무도 답을 내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엔 침묵과 불신이 퍼졌다.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로 한가지 구호만 앵무새처럼 외칠 수 있었다. 탑이 삐뚤어져도 삐뚤어졌다고 말할 수 없었다. 누구도 전체를 조율하지 못했다. 벽돌을 쌓고 또 쌓아도. 쓰러지고 또 쓰러졌다. 공사를 강행할 수록 희생만 늘었다.
그때 사람들은 알았다. 더 이상 이곳에서는 진리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같은 언어, 같은 이론, 같은 신앙으로는 길이 막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새로운 재료를 찾아 나섰고, 어떤 이는 다른 기술을 익히러 떠났다. 또 다른 이는 전혀 다른 신앙과 관점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각자의 언어를 갖게 되었고, 각자의 논리를 세웠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진리를 모색했다. 남은 것은 멈춰 선 탑과, 그 곁에 붙은 이름 하나뿐이었다. ‘바벨’ — 혼잡, 뒤엉킴. 그러나 그 혼잡 속에서야 비로소 세상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하나로 뭉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비결이라고 믿었다. 외적으로는 집단의 힘이 강할수록 타 종족이나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고, 내적으로는 통일된 질서 속에서 인간의 존엄이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신념, 하나의 목적이야말로 혼란 없는 세상의 기초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믿음의 균열이 드러났다. 하나의 언어는 편리했지만, 새로운 발상을 막았다.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혁신이 태어나지 않았다. 외적으로는 안정이 오히려 정체를 불렀고, 내적으로는 다양성의 부재가 인간의 상상력을 말려 죽였다. 결국 인류는 깨닫게 된다 — 통합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문명이 진화한 것은 언제나 ‘퍼져나갈 때’였다. 도시가 성벽을 넘어 교역로를 열 때, 사상이 국경을 넘어 타 문명과 만날 때, 새로운 시각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흔들 때마다 인류는 한 단계 도약했다. 언어는 갈라지고, 문화는 달라지고, 신앙과 철학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꽃피웠다. 그 차이와 충돌 속에서 새로운 진리가 태어났다.
지적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같은 방향만 바라보는 눈은 결국 시야를 잃는다. 인간의 사고는 서로 다른 관점이 마찰을 일으킬 때 더욱 날카로워진다. 예술과 과학, 감성과 이성이 서로를 견제하며 자극할 때 창조의 불꽃이 피어난다.
결국 인류의 진화는 ‘하나로 모일 때’가 아니라, 세상 곳곳으로 뻗어나갈 때 완성된다. 다양성이야말로 생명의 본능이며, 차이는 분열이 아니라 진화의 언어다. 생물은 단세포들이 모여서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세포분열을 일으켜 성장하는것이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 인류는 흩어짐을 통해 다시 우주적 조화를 배워가고 있다 — 각자의 자리에서 다르게 빛나면서,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의식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하나의 언어로 통일하려 하고,
모든 이견을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리며,
다양성보다 속도를, 관계보다 시스템을 중시하는 지금 —
우리는 다시 그 옛날의 탑 아래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늘에 닿기 위해 세운 탑은 결국 하늘에 닿지 못했다.
진화의 길은 위로 쌓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 서로를 이해하며 넓혀가는 것임을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한다.
바벨탑은 한때 붕괴됬지만, 그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다른 형태의 탑을 쌓고 있다.
벽돌 대신 사상으로, 진흙 대신 언어로, 손 대신 기술로.
제국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이 모든 것은 시대마다 세워진 또 다른 바벨탑이었다.
제국주의는 하나의 힘으로 세상을 묶으려 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질서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문화를 짓눌렀다.
그러나 그 탑은 피로 쌓였고, 피로 무너졌다.
공산주의는 평등이라는 이상으로 하나의 설계를 그렸다.
모두가 같은 벽돌로, 같은 높이에서 살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다양성은 그 틀 안에 머물지 않았다.
결국 탑은 내부에서 갈라졌다.
민주주의는 자유라는 언어로 또 하나의 탑을 세웠다.
모두의 목소리를 담겠다고 했지만, 그 안에도 언제나 더 큰 목소리가 있었다.
자유의 이름 아래 여전히 억눌리는 이들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번영과 성장으로 탑을 높였다.
탑의 꼭대기는 빛났지만, 아래는 그림자였다.
탑이 높아질수록 불균형은 깊어졌고, 언어는 다시 갈라졌다.
인류는 매번 더 나은 탑을 세운다고 믿었지만,
결국 탑은 언제나 같은 이유로 무너졌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신앙으로 세워진 탑은
언제나 다양성을 이기지 못했다.
바벨탑의 붕괴는 상상속에서 잊혀져가는 전설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또 다른 바벨탑을 세우고 있다.
이제는 기술과 데이터가 세상을 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며,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이려 한다.
그것이 효율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또 다른 바벨탑의 시작일지 모른다.
탑이 높아질수록 균열은 깊어진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선은 틀린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생각은 다시 흩어지고, 언어는 제 갈 길을 찾는다.
혼란 같지만, 그 흩어짐 속에서 인류는 늘 새로운 길을 만들어왔다.
바벨탑의 붕괴는 실패가 아니라 순환이다.
하나의 질서가 완성될 때마다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고,
하나의 신념이 굳어질 때마다 다른 신념이 생겨난다.
우리는 지금도 그 순환 안에 있다.
하나로 모이려 하고, 다시 흩어진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인류는 조금씩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