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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 사용 설명서

제17화. 창세기로 읽는 인간 내면과 의식의 지도

by 무이무이

우리가 그동안 성경전서 창세기, 그중에서도 천지창조의 첫 장을 우주창조론의 관점으로 확장하여 해석해 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에서부터,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라는 의식의 복제 그리고 안식의 의미까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기준으로 읽으면, 창세기의 순서는 지구의 환경이 만들어지는 실제 순서와 다소 어긋난다.
태양과 지구는 거의 동시에 태어났고, 달 역시 지구와 테이아의 충돌로 거의 동시에 생성되었지만, 창세기에서는 천지가 먼저 창조되고 해와 달은 넷째 날에 등장한다. 심지어 식물은 태양보다 먼저 생겨나버린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단순한 지구 창조사가 아니라, 우주 생성 순서와 원리를 담은 기록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요약해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라는 구절은 초기 천지, 즉 물질과 반물질의 초대칭 상태를 암시한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내용은, 초기 초대칭 상태에서 양자 요동이 물질과 반물질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현대 양자우주론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초대칭이 깨지고 광자 에너지가 확산되는 현상은 지금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배경복사와 일치하며, “빛이 있으라”라는 구절과도 절묘하게 맞물린다.
이 우주배경복사를 통해 창세기가 말하는 ‘궁창’, 즉 우주의 거대 그물망 구조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셋째 날, 중력장이 형성되는 장면은 은하들의 씨앗이 되는 나무, 즉 우주 생명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다.
넷째 날에 등장하는 퀘이사—별의 탄생과 소멸, 낮과 밤을 주관하는 광명체는, 우주를 지배하는 빛과 블랙홀을 상징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의 저자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주의 생성 원리와 순서를 꿰뚫어 본 초월적 지식인이거나, 어쩌면 우주를 직접 창조한 당사자였을 수도 있다. 고대인의 수준에서는 초대칭이나 우주배경복사, 코스믹웹 같은 개념을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땅, 해, 달, 식물, 동물—로 비유하여 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아직 과학이 풀지 못한 우주의 비밀을 암호처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인간이라는 신의 복제의식이며 이 복제의식의 지속적인 작동을 위한 질서유지. 즉 안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창세기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우주작동원리와 두뇌작동원리가 같다는 설명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 뒤에는 아담과 이브, 선악과, 카인과 아벨, 그리고 그 후손과 신의 아들들, 네필림, 노아시대의 홍수와 세 아들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내용을 단순한 스토리텔링으로 소비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이야기들은 우주 생성 원리만큼이나 인간 본성과 내면, 자아성찰 없이 본능대로 살았을 때 벌어지는 결과를 꿰뚫어 보는 심오한 심리학적 통찰이다. 즉 우주생성원리를 이해하고 두뇌사용을 올바르게 하며 자아성찰을 통해 주기적인 리셋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 이야기를 기록한 이는 인간을 창조한 당사자이거나, 인간 내면을 완벽히 간파한 초월적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들춰보자.






아담과 이브, 뱀과 선악과.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뱀의 충동질로 인해 선악과를 따먹고, 결국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신화나 종교적 교리로만 기억한다.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에서는 이를 아담의 원죄론과 연결해, 예수의 보혈과 구원론에 접목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고대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신화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인간이 뇌를 사용하는 방식을 기록한 [ ‘뇌 설명서’이자, 잘못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위험과 경고를 담은 지침서]다.


아담은 이성과 공부하는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고 탐구하며, 질서와 원리를 찾는 존재다. 반면 이브는 충동과 감성, 즉 즉각적이고 생생한 인간적 반응을 대표한다. 그리고 뱀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생존 본능이다.


이 생존 본능은,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 가장 간편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선과 악, 흑과 백, 좋음과 나쁨으로 세상을 쪼개려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본능이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그 감정을 프레임으로 정리하는 과정을 우리가 이성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이성과 감성, 그리고 본능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할 때,
뱀의 속삭임[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틀 ]에 갇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편협하게 바라보고, 자신과 타인을 제한된 시선 속에 가두는 경고의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도대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왜 먹었을까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는 오늘도 매 끼니 선악과를 먹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인류 최초의 인사이드 아웃 https://brunch.co.kr/@anymoonmuimui/111




카인과 아벨, 살인과 카인의 성


다음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최초 살인, 카인과 아벨의 사건이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였다. 둘 다 자신이 일군 성과를 신에게 제사로 바쳤지만, 신은 아벨의 제사만 인정했다. 그 순간, 마음속에 자리한 질투와 열등감이 카인을 지배했다. 아벨을 향한 시기심과 분노가 그의 이성을 흔들었고, 결국 그는 아벨을 죽이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뒤, 카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세상의 시선과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는 여기서 독특한 장면을 보여준다. 신이 카인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징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장면은 겉으로 보면 이상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죄책감과 방어기제, 그리고 인간의 자기 보존 본능을 상징한다. 카인의 제사, 즉 노력과 땀으로 일군 성과는, 인간의 ‘땀의 가치’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자수성가 같은 것이다. 반면, 아벨의 제사는 타고난 재능이나 거저 주어진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인정받은 성과다.

인간은 이 두 성과에 대해 모순된 감정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노력 없이 얻은 성과를 부러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존심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우리 마음속의 ‘카인’은 나만의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면서, 나를 만든 순수한 배경과 조건들을 억지로 지워버리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뇌 속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창세기는 이를 “아벨의 피가 울부짖는 소리”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아벨을 지키는 수호자입니까?”
즉, 노력 없이 얻은 성과를 잊으려 하거나 정당화하려는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결국 카인은 자기 땅에서 쫓겨나 떠돌이가 된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욕하고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에 신은 선언한다. “카인을 해하는 자는 7배의 벌을 받으리라.”
하지만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카인의 행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벨이 금수저든 흙수저든, 카인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심 없다. 사람들은 자기 삶에 바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고, 그 속에서 불안해할 뿐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다.
자신만의 성을 쌓고,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인간 심리를 보여주는 경고다.
노력과 재능, 성과와 질투 사이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내적 갈등과 그 함정—카인의 살인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매일 내면의 아벨을 인정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교훈이다.


인류 두 번째 인사이드 아웃 https://brunch.co.kr/@anymoonmuimui/119




카인의 후손과 세츠의 후손들 사이에서 태어난 네피림. 그리고 노아시대 홍수.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은 카인의 후손들과 아담과 이브의 또 다른 아들, 세츠의 후손들이다.
이 또한 우리 내면의 세 번째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카인의 후손들이 장인정신의 소유자로 나온다.
악기를 만들고, 그릇을 만들고, 무기를 만든다.
이것은 곧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는 장면이다.
잘 먹고, 잘 즐기고, 또 잘 지키려는 인간의 욕망이 결국 문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반면, 세츠의 후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천사나 신적 존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제발 로마신화는 로마에 가서 쓰자)
이야기의 본질은 우리 내면의 신앙적 요소, 즉 자아성찰과 명상, 묵상의 욕구를 표현한 것이다.

사람은 동굴에 들어가서 도를 닦기만 하며 살 수 없다.
그러면서도 욕망만 채우며 살다 보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자연스럽게 두 욕구 사이에서 타협하게 된다.

창세기에서는 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인하여 자녀를 낳는다."
그 결과 태어난 존재가 바로 네피림이다.
네피림은 머리는 하늘에 닿고, 발은 땅의 진흙 속에 빠져 있는 거대한 존재로 묘사된다.
바로 신앙적 욕구와 쾌락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려는 이중 잣대가 만들어낸 괴물,
즉 인간 그 자체인 셈이다.

네피림의 등장 후 창세기에서는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신은 인간 창조를 후회하며, 홍수로 세상을 씻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곧 이중 잣대로 살아가다 보면 외적으로는 위선으로 가득해지고 내적으로는 스스로 자괴감과 허무함에 빠지고,
태어난 것을 후회할 정도로 우울해진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방주다.
순수한 마음만 남기고, 그동안 두 마리 토끼—욕망과 신앙—를 모두 잡으려던 이중 잣대를 빨리 씻어내라는 의미다.
그래야 비둘기가 올리브잎을 물고 돌아오고, 무지개가 뜨게 된다.
즉, 인간의 의식이 넓어져 평화가 찾아오고 정신적 스펙트럼이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영혼을 깨끗이 하여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이중적 욕망과 잣대는 결국, 인간 내면에 네피림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경고인 것이다.



노아의 아들 셈(보호/존중)과 함(관종/폭로) 야벳(확장/번영).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는 텍스트만 보면 다소 실망스러운 장면들로 가득하다.
홍수로 세상이 씻긴 뒤 구해진 노아가 어느덧 낮부터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들어버리는 광경을 보면, 읽는 사람도 얼굴이 달아오를 만하다.
하지만 기억하라 — 노아는 먼 옛날의 누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노아의 벌거벗음은 나의 취약점과 치부이며, 그의 세 아들의 반응은 내면의 서로 다른 본능들이다.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 밖으로 나가 떠들어댄다. 그 소문을 퍼뜨리는 행위는, 내면적으로 보면 “관종적 본능”이며, 외적으로 보면 남의 허물을 들추는 비방. 또는, 잘못된 것을 밝혀내려는 용기이다.
그에 반해 셈은 조용히 다가가 옷을 덮어준다. 셈의 행동은 치부를 숨기려는 본능이자,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양심의 표정이다. "야벳(확장/번영) 셈을 따라 같은 행동을 취하되, 그 의미는 확장과 번영 — 사회적 네트워크의 팽창을 상징한다.

깨어난 노아는 세 아들의 행동을 보고 각각에게 저주와 복을 내린다.
옷으로 치부를 가려준 셈은 형제들 위에 군림하게 되고, 함은 형제들의 종이 되며, 야벳은 번영하고 확장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다.
이는 단순한 운명 논리가 아니다. 내면의 세 본능—드러내는 본능(함), 감추는 본능(셈), 확장하는 본능(야벳)—이 사회적 결과와 인간관계의 구조를 어떻게 빚어내는지를 말해준다.

이 두 가지 본능, 드러내는 것과 감추는 것은 본래 ‘나쁘다/착하다’로 단정할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고, 때로는 감추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대인관계에서는 감추는 선택이 때로는 관계의 확장과 사회적 인정으로 이어진다는 교훈을 우리는 배운다.
야벳의 이름 자체가 ‘확장’이라는 뜻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창세기의 이야기는 우주의 본질을 탐구할 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본질을 탐구하는 ‘두뇌 사용 설명서’이다.
겉으로는 고대 신화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일상, 관계, 본능과 선택을 읽어내는 지도다.


네피림의 손가락 화석이나, 노아 방주의 나무 조각을 찾아 헤매지 말자. 아담의 원죄론이나 카인의 살인 사건을 비판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매일 먹는 선악과를 끊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과 환경에 진심으로 감사하자. 영적 욕구와 육체적 욕구를 모두 채우려던 이중적 잣대를 내려놓고, 타인의 허물을 덮으며 마음을 넓히자. 그리하여 우리의 의식이 넓게 펼쳐지고,
세상과 나, 그리고 서로가 하나로 이어지는 풍경을 느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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