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21화
판타지 장르의 영화, SF영화의 제목만 봐도 설렌다.
이상하게도, 인간의 의식은 현실 속에 갇혀 살지만, 마음속에서는 "이 세상에 없는 세계를 설계한다".
이름 없는 나라, 존재하지 않는 생물, 숨 쉬는 법조차, 모르는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
그곳에서는 시간이 뒤틀리고, 중력이 생각대로 흐르며, 마법과 괴물, 신화적 존재가 날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혼돈 속에서 "완벽한 질서"를 느낀다.
판타지 덕후들은 판타지물을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마법 체계(magic system)를 분석하고, 세계의 생태(fantasy ecology)를 탐험하며, 신화적 모티브(mythic motifs) 속 숨은 질서를 찾아낸다.
그것은 취향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내재한 "심연의 욕망", "세계건축(worldbuilding) 본능"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힘과 자유, 규칙마저 손 안에서 재정의될 때,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넘어선 "무한 가능성의 우주"를 맛본다.
인간의식은 판타지를 언제부터 추구했을까.
그리스 신화, 북유럽 신화… 고대 신화는 모두 판타지의 조상이다.
신과 인간, 영웅과 괴물,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직감하고, 그 체험을 욕망한다.
판타지를 단지 허구라고만 볼 순 없다.
현실에 갇힌 인간 의식이 심연의 본능을 폭발시키는 "상상력의 폭풍",
아직 만나지 못한 세계와 맞닿는 "심연의 창문"이다.
우리는 왜 그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가.
그곳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나라", "현실에 닿을 수 없는 세계"다.
“그저 상상일 뿐이니까 못 가는 게 당연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없는 세계를 그토록 선망하는가?
왜 현실과 무관한 공간에 마음을 빼앗기고,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갈망하는가?
그저 재미 이상의 무엇, 인간 의식의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힘이 "창문 너머를 향한 시선"을 강제하는 것은 아닐까.
그 단서를 찾기 위해 우리는 "원초적 판타지, 고대 신화"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북유럽의 오딘과 라그나로크....
그 이야기들은 신화, 신앙 이전에, 인간이 최초로 그려낸 "창문 너머의 세계 지도"였다.
신과 인간의 경계, 초월적 존재의 힘, 영웅의 여정과 파멸.
이 모든 구조는 오늘날의 판타지 세계건축(worldbuilding)과 그대로 이어져 있다.
현대 판타지와 SF도 사실 이 신화적 모티브를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블의 히어로들은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리스 영웅의 후예이고,
SF 속 인공지능과 우주신은 태초의 혼돈에서 질서가 태어나는 "창세 신화"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장르가 달라져도, 무대가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문을 두드리고" 있는 셈이다.
결국, 신화와 판타지는 모두 "판타지 본능의 단서"를 품고 있다.
덕후들은 그 단서를 쫓으며 무의식적으로 질문한다.
“왜 우리는 없는 세계를 욕망하는가?”
일반 독자들 역시 신화적 흔적을 탐구하다 보면, 언젠가 그 심연에 닿게 된다.
심연의 창문 너머에는, 우리 본능의 기원이 숨어 있다.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책, 바이블(성경).
그중에서도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너무 유명해서, 아담이 배꼽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실없는 논란? 까지 수없이 회자될 정도다.
하지만 웃어넘길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성경 속 창세기 이야기는 신화적, 종교적 교리를 넘어,
"인류가 가진 가장 근원적인 판타지 서사 중 하나"라는 점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장면,
그리고 천사들에 의해 에덴에서 쫓겨나는 장면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단순한 신앙의 교훈을 넘어 ‘심연의 창문 너머’를 보여주는 원초적 판타지로 읽힌다.
창세기 이야기가 매혹적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인간 의식 속에서 반복되는 원형(archetype)"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이야기와 닮아 있고,
북유럽 신화의 라그나로크처럼 "신과 인간의 경계를 뒤흔드는 서사"와도 닮아 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단순한 종교적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보며 던진 최초의 질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왜 금지된 문을 열었는가, 왜 우리는 에덴에 머물 수 없는가”라는 심연의 의문에 대한 서사적 대답이다.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무한가능성의 에덴의 문은 닫히고 미스가르드(지구인간세계)라는 하나의 세계로 붕괴되는 그 장면.
흥미롭게도, 이 질문은 현대 물리학이 던지는 물음과도 닮아 있다.
우주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왜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만이 ‘지금 이 현실’로 선택되었는가?
고대의 신화가 상징으로 말하던 창조의 비밀을, 현대의 양자역학은 수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관측된 세계’다.
무한한 가능성이 파도처럼 겹쳐 있다가,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순간 하나의 형태로 ‘붕괴’되는 세계.
즉, 지금 우리가 보는 이 현실은 ‘무한한 함수 중 하나가 선택된 결과’ 일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무한한 가능성들 — 관측되지 않아 여전히 흔들리는 세계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세계는 사라진 게 아니라, 여전히 잠재로 존재한다.
우리가 꿈꾸고 상상하고, 판타지로 만들어내는 세계들이 바로 그 흔적일지도 모른다.
판타지는, 붕괴 이전의 우주에 흩어져 있던 무한한 가능성들의 ‘의식 속 재현’이다.
우리가 마법과 신화, 또 다른 차원을 그려낼 때, 사실은 아직 관측되지 않은 우주의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 속에서 복원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