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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을 가본 적이 있는가.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제24화

by 무이무이
-죽음의 문턱 시리즈 첫번째.-





오랜만에 나는 나의 암울한 유년기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려한다.
왜냐하면 그 시절은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사실, 엄마의 독특한 종교적 철학과 신앙의 굴레가 나를 억압하고 나의 성장을 방해했는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내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단지 나의 내면에서만 벌어지는 일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될 만한 일인지는 각자의 기준과 판단이 요구되는 문제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단순히 판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안에 강제성이 부여되고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따른다면, 그것은 학대나 다름없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의 억울함을 끌어올리기엔 충분했다.

잦은 금식과 율법적 통제는 어느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엄마의 세계관은 그중에서도 지나치게 과했다.





처음엔 그냥 배가 고팠다.
3일 금식.
그것은 식사를 거르는 수준이 아니었다.
밥도, 물도,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 하루는 그저 허기였다. 밥을 안 먹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둘째 날이 되자 배고픔보다 목이 말랐다.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그때부터는 밥이고 뭐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직 목마름만 남았다.

목이 바짝 말라서 침도 삼키기 힘들었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기운이 빠지고, 탈수와 기진의 경계가 찾아왔다.

빈속이 뒤틀리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고통을 잊고자 잠을 청하지만, 갈증이 숙면을 방해했고 두통과 멀미에 환각이 보였다.
그렇게 그 상태를 견뎌야 했다. 그것이 ‘훈련’이었고, ‘영혼의 각성’이었다.

밖에는 나갈 수도 없었다.
친구들은 놀러 다니는데, 나는 방 안에 갇혀 있었다.
3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직 고통만을 견디며 앉아 있었다. 양치 후에 입에 남은 물기가 목구멍을 통해 한 방울이라도 넘어가면 그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아이에게 세상과의 연결을 끊는 일,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그땐 몰랐다.

엄마는 말했다.
“지옥의 고통을 미리 맛봐야 한다. 그래야 영혼이 산다.”
그 말은 나쁘지 않은 의도에서 나왔다.
자식의 영혼을 살리겠다는 강한 믿음, 예수의 금식과 기도를 본받겠다는 신념.
하지만 그 믿음은 너무 뜨거워서, 결국 자식을 태웠다.
엄마는 “육체를 버림으로써 영혼이 깨어난다”라고 믿었고,
나는 그 믿음을 철석같이 따랐다.
죽을 것 같으면서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6개월에 한 번 72시간의 금식이 있었다.
6개월에 한 번씩, 몸의 살을 다 빼는 의식처럼 찾아왔다.
일요일 마다도 금식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해지기 전까지 금식하는 이슬람의 라마단과 비슷했다.
“그건 이단이야”라고 하면서도, 어머니는 이슬람보다 더 철저해야 한다고 했다.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더 했다. 더 철저히 굶고, 더 길게 버텼다.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렸다.


금식 끝에 식사는 그 무엇보다 달콤할것 같지만, 그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72시간 만에 처음 먹은 음식은 모두 토해내야 했다. 나의 만성 위염과 식도염은 모두 그때 시작된 것이었다. 72시간 동안 마비된 위와 장이 받아주지 못할걸 알지만 본능적으로 물과 음식을 밀어 넣고 구토와 설사로 하루정도 앓아누워야 간신히 회복되곤 했다. 그럴 때면 차라리 금식 중인 상태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친구들은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왜 굶는지도 모른다.
이상한 교회에 다니는 아이로 나를 보던 사람들.

나는 외계인 취급당했다.

그 시절의 나는 ‘신앙의 아이’가 아니라,
‘신앙의 실험체’였다.

그리고 이제야 안다.
그때의 고통은 단순히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경계까지 침범하는 일이었다는 걸.
몸이 말라붙고 의식이 흐려질수록,
나는 점점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살아 있으라 명령받은 자’로 변해갔다.



그때는 몰랐다.
그 금식이 내 영혼을 깨우는 게 아니라, 내 뇌를 손상시키고 있었다는 걸.
정신세계는 뇌라는 장기에 의존한다.
뇌가 건강하지 못하면, 어떤 의식도 깨어날 수 없다.
뇌파는 왜곡되고, 사고는 흐려지고, 결국 ‘영혼의 각성’이라 불리던 것은 단지 [기아 상태의 환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안다.
금식이 답이 아니다.
예수가 말한 금식과 기도는 절제, 금욕, 묵상,
즉 ‘내면의 질서’를 되찾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것을 공식처럼 신체의 고통으로 치환한 건, 누군가의 오해에서 비롯된 신학적 착시다.


육체는 내가 아니다.
나는 육체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정보와 의식의 합성체,
즉 [존재의 공식]이다.
이 뇌가 우주의 파동을 받아들이는 안테나라면,
그것을 상하게 하는 행위는 어떤 깨달음과도 거리가 멀다.






학교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나에게 학교생활의 가장 큰 고통은 ‘급식’이었다.

먹는 문제, 그것은 식습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엄마의 규율과 신앙을 어긴다는 두려움,

그로 인한 죄책감, 그리고 그 사실을 남에게 들킬까 봐 느끼는 창피함이 뒤엉킨 문제였다.


그날 급식으로 오징어국이 나왔다.

그 냄새는… 솔직히 말해, 세상 어떤 음식보다도 사랑스러운 냄새였다.

그러나 엄마의 율법은 그것을 금했다.

오징어는 비늘이 없는 생물,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것.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율법에 따라,

비늘 없는 생선, 되새김질하지 않는 짐승, 굽이 갈라지지 않은 동물은 먹을 수 없었다.

그 규칙은 고대의 율법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엄마의 논리는 이랬다.

무슬림들도 라마단을 지키고 돼지고기를 멀리하듯,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보다 더 철저해야 한다.

이방인도 그 정도의 절제를 하는데,

우리가 그보다 못해서야 되겠느냐.

그래서 우리는 더 철저히 절제했다.

문제는, 그 사회 속에서 그 절제를 지키는 게

단순히 ‘규범’이 아니라 ‘고립’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 오징어국을 먹지 않았다.

그게 죄였으니까.

그러자 선생님이 물었다.

“왜 오징어를 먹지 않니? 편식하니?”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친구들 앞에서 우리 집의 독특한 규율을 말한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말을 하지 않자 선생님은 화가 났다.

고집이 세고, 버릇없는 아이로 보였겠지.


결국 나는 발바닥을 맞았다.(손바닥보다는 발바닥을 때리면 혈액순환에 좋다고 했다.)

“생각을 바꿔보지 않을래? 이제 먹는 걸 시도해 보지 않겠니?”

그 질문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더 세게 맞았다.

맞는 동안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맞았을 때,

선생님이 나를 불러 따로 이야기를 했다.


그제야 나는 말했다.

“저희는 이런 종교를 믿기 때문에, 먹을 수 없습니다.”

말을 꺼낸 순간, 선생님의 표정이 바뀌었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선생님은 나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을 것이다.

곧 미안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네 신념이 참 대단하구나. 나 같으면 그냥 먹었을 거야.”


그날 이후 선생님은 나를 벌하지 않았다.

매질이 건강에 좋다며 발바닥을 때리던 그 선생님이,

이상하게도 나만은 예외로 두었다.

다른 아이들이 혼날 때도, 나는 조용히 넘어갔다.

마치 신앙의 시험을 통과한 아이에게

하늘이 보상을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 고통을 견뎌낸 건 ‘은총’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건 은총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자기 최면이었다.

두려움과 수치, 고립 속에서 만들어낸

생존의 언어였다.






남들이 보기엔 나의 암울한 유년기, 그 경험들이 사이비 종교의 추악함, 학대의 산물처럼 보일 것이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신앙의 잔혹사로 읽힐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종교가 반복하고 있는 일이다.

기독교는 무엇을 근거로 예수를 믿는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단 하나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정신적 평화도, 우주와 인간의 의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본질적 사유도 사라진 채, 오직 “죽지 않고 천국에서 살겠다”는 일념만 남았다. 그 허황된 욕망이 교리의 뿌리를 만든다.

그래서 원죄를 찾는다. 인간은 원래 죄인이라고, 그렇게 낙인찍어야 논리가 완성되니까. 인간을 죄인의 동물로 만들고, 감옥 같은 교리 안에 가둔다.
그 감옥의 문은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잠겨 있다.
“예수를 믿으면 죄가 씻긴다.”
그 한 문장이 모든 굴레를 완성한다.

하지만 영생이란 그런 게 아니다.
영생의 목적은 천국이 아니라 [존재의 연속성]이다.
내가 말하는 정보와 의식의 결합, 그 조합이 바로 존재의 본질이다.
육체가 사라져도 그것은 소멸이 아니다.
정보로 돌아가고, 그 정보는 다시 의식 속에서 깨어난다.

진짜 불멸은 그 순환 안에 있다.
그것을 망각한 채, 천국에서의 영화를 꿈꾸는 자들은 결국 스스로 만든 교리의 감옥에 갇혀 산다.
그 신앙은 구원이 아니라 [망상의 구조물]이다.







현대 기독교는 예전처럼 가혹한 신앙 규율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더 이상 3일 금식이나 절대적 육체적 고통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강한 신념이 만들어낸 교리적 틀은 여전히 신앙의 본질을 가려버린다. 본질이란, 사실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득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 사회적 이익과는 무관하다. 신앙의 본질은 단순히 나와 우주 사이에서 진실이 밝혀지는 일이며,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과는 무관하게, 개인적 의식의 흐름 속에서 깨닫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현대 기독교는 조직으로서의 생존과 확장을 목표로 한다. 그 과정에서 신앙을 자기 교리 안에 가두고, 사람들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교회는 세력을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 왕성한 선교 활동, 기부,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 확대는 겉보기에는 성스러운 목적을 위한 활동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교리와 신념을 이용한 세력 유지와 이득 취득이라는 현실적 동기와 결합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의식적 자유와 진정한 신앙적 경험은 제한된다. 신앙인들은 종종 교리와 신념이 제시하는 길에서 벗어나면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끼도록 학습된다. 결과적으로, 종교는 본질적인 역할, 즉 인간과 우주 의식의 연결을 돕고 깨달음을 이끄는 기능을 상실한다. 오히려 그 강한 신념과 철저한 논리는 인간과 거대 의식의 흐름을 방해하고, 개인의 의식 발전보다는 집단의 권력 유지와 경제적 이득 확보에 더 기여하게 된다.

결국, 현대의 기독교 역시 겉으로는 온화해 보일지 몰라도, 그 구조 속에는 여전히 신앙인들을 자기 안에 가두고, 자유로운 깨달음과 진정한 영적 경험을 제한하는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그것은 과거의 극단적 강요보다 더 은밀하고 교묘하며, 여전히 인간의 의식과 우주적 흐름을 제한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진정한 신앙의 본질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신앙인들이 겪는 정신적, 심리적 부담은 과거보다 은밀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은 거대한 바벨탑이다.
그 탑은 하늘을 향하지만, 실은 인간의 욕망으로 쌓여 있다.
그 탑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성이며, 동시에 소돔과 고모라다.
모두가 모여 하나의 신념, 하나의 질서, 하나의 목소리를 세우려는 곳.
그곳에서는 각자의 영혼이 사라진다.

그 바벨탑으로부터 떠난 여정이 있었다.
그곳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자신만의 신앙을 찾아 광야로 향한 사람이 있었다.
그게 바로 우리 외할머니와 엄마다.
엄마는 현대의 신념 체계를 벗어나, 오직 신과 자신만이 존재하는 그 벌판으로 나아갔다.
그 여정은 고통스러웠고, 끝없는 괴리와 모순으로 가득했다. 남들과 다른 신앙과 남들과 다른 규율, 남들과 다른 종교철학은 그 어떤 도움도 배움도 없어 보였다. 육체적 정신적 자학만이 자행되는 소굴 같았다.
하지만 그 광야 속에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성경이 숨기고 있던 진리,
우주가 인간을 통해 깨어나고자 한 그 진동이 내 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건 엄마의 고통과 나의 상처가 겹쳐 만들어낸 파동이었다. 엄마의 신앙적 과잉, 종교철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만들어낸 파동.

그래서 나는 엄마를 원망하지만, 동시에 원망하지 않는다.
그 원망은 결국 이해로 녹아든다.
그녀가 떠난 길이 있었기에, 나는 ‘깨어남’이라는 또 다른 길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엄마가 바벨탑을 떠나게 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종교적 압박을 함께 살펴야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의 교회는 일본 제국의 강압 아래 놓여 있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 천황을 유일한 신으로 여겼다. 제국의 황제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공식적 요구였다. 이에 따라 한국인들은 일본을 향해 경배하고 복종할 것을 강요받았고, 교회 역시 일본의 정치적 목표에 부응하도록 압박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교회 활동을 장려하는 대신,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교회가 거둔 십일조와 헌금의 일부를 일본에 헌납할 것. 둘째, 낮 12시에는 반드시 일본 천황과 궁전이 있는 도쿄를 향해 경배를 올릴 것. 교회 지도자들은 이 요구를 타협하며 받아들였다. 한국의 교회들은 신앙적 신념과 일본의 강압 사이에서 절충안을 마련했고, 그 과정에서 교회 자체가 규정하고 있는 우상숭배 행위를 자행하게 된다. 헌금과 십일조는 일본의 전쟁 물자와 자금으로 전용되었다. 한국교회들이 일본에 전투기를 헌납한 사실을 통해 일부를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목사와 교인들이 탄압을 받았고,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며 신앙적·신체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으니, 바로 최덕지 여사였다. 그녀는 감옥에서 끝끝내 일본 천황에 대한 경배를 거부했고, 이를 신앙적·민족적 의무로 간주하며 수많은 고문을 받았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석방되었지만, 모진 고문과 잦은 금식기도로 인해 이미 몸은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최덕지 여사가 살아생전 주장한 바는 명확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교회들은 도쿄를 향한 경배를 신도들에게 강요했고, 신도들의 헌금을 일본에 제공함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 이는 교회가 철저히 각성하고 회개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공론화되지 않았고, 교회는 이승만 정권의 보호 아래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장악하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교회는 회개 없는 믿음 속에서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고, 역사적 책임을 외면한 채 세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역사적 부정과 타협 속에서, 우리 엄마와 할머니는 최덕지 여사의 신념을 따르게 된다. 교회의 타협과 위선, 회개 없는 성장 속에서, 그들은 자신만의 신앙을 찾기 위해 바벨탑을 떠나 광야로 향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괴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자기만의 신앙을 형성하고,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강요로부터 벗어나 내면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이렇게 엄마가 선택한 여정이 바로 내가 경험하게 된 유년기의 신앙적 기반이 되었고, 나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성찰과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된다.


당시의 한국 교회는 식민지 사회 속에서 ‘존재를 유지해야 하는 조직’이었다. 일제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제국의 충성 체계 안에 교회를 묶어두려 했다. 교회가 십일조와 헌금으로 전쟁물자를 헌납하고, 천황을 향해 경배하는 의식을 강요받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 안에서 목회자와 신도들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신앙을 지키려면 교회를 닫아야 했고, 교회를 지키려면 신앙의 본질을 꺾어야 했다.
이건 단지 “배신”이나 “타협”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의 모든 교회가 같은 길을 걸은 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침묵 속에서 버텼고, 어떤 이들은 끝내 그 굴복을 거부했다. 누군가는 옥고를 치렀고, 누군가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시대의 교회를 일률적으로 비난하거나 미화할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 절망의 역사 속에서도 여전히 다른 빛깔의 신앙이 숨 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희미한 불씨가 이후의 시대를 다시 밝혀낸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떠나온 우르성은 오늘의 교회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벨탑을 세운다. 그 탑은 콘크리트나 벽돌이 아니라, 헌금의 총액과 예배 참석자의 숫자로 쌓여간다. 그들은 신자의 수를 세며 아브라함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모래에 대한 약속은, 단순히 수의 많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세계를 가리킨다. 그 별과 모래는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확장되는가’의 문제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신자의 수나 교회의 크기 같은 외형적 번영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이 끝없이 확장되고, 또 끝없이 변주되는 우주의 흐름에 동참하라는 초대였다. 별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불타는 변화의 흔적이며, 모래는 고정된 입자가 아니라, 파도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존재다.


그렇다면 ‘약속’이란, 고정된 신념이 아니라 변화를 감내하는 의식의 유연함이다.

하늘의 별이 한 점의 불씨로, 바다의 모래가 하나의 파동으로 이어지듯—

진짜 신앙은 세는 행위가 아니라, 끝없이 깨어나는 의식의 확장 그 자체다.


아브라함은 우르의 화려한 신전에서 떠났지만, 그 떠남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첫걸음이었다. 그는 신의 집을 짓지 않았다. 대신 광야에서, 별빛 아래에서 자신이 신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그것이 약속의 본질이었다.


오늘의 바벨탑은 무너질 것이다.

숫자와 제도의 신앙은 결국 자신이 만든 탑의 무게로 붕괴된다.

그러나 그 잔해 속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별을 올려다볼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이 자기 안에서 깨어남을 느낄 때—

그때야말로 아브라함의 약속이 진정으로 이행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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