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제25화.
-죽음의 문턱 시리즈 두 번째.-
엄마는 항상 눈이 퀭하고 볼이 홀쭉했다. 쇄골에는 물 한 컵쯤 담을 수 있을 것 같았고, 팔다리는 앙상했다. 이모들은 엄마가 산송장이나 다름없다며 금식기도를 멈추라고 했지만, 엄마는 듣지 않았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의사였던 셋째 이모부가 직접 집에 와 링거를 꽂아 준 적도 있었다. 그때 이모부는 주삿바늘을 꽂으며 “이건 사람의 팔이 아니야” 하고 탄식했다.
엄마는 온몸이 부서질 듯한 기침을 자주 했다. 그때마다 갈라지는 가슴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나는 그 손끝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기억한다. 내가 잘못을 하면 숨을 몰아쉬며 꾸중하다가도 금세 기침이 터져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엔 눈물 섞인 한숨을 내쉬며 “됐다…” 하고 포기하듯 돌아섰다. 누가 봐도 살아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엄마는 내가 세 살 때 폐결핵에 걸렸다.
당시 산골의 외딴집에 살던 엄마는 치료 시기를 놓쳤고, 병은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번져 있었다.
결핵균은 엄마의 폐를 아홉 할쯤 갉아먹었다. 병원에서는 아빠와 이모들에게 “희망이 없으니 준비하라”며 사실상 시한부 선고를 내렸다고 한다.
엄마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따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병세가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던 어느 밤, 꿈을 꾸었다고 했다.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었고, 거의 하늘 끝에 닿을 무렵 누군가 호통치듯 외쳤다고 했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여전히 병실이었다.
“지은 죄가 많아서 더 살다 오라고 쫓겨난 것 같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쓸쓸히 웃곤 했었다.
나는 어느 두메산골의 쓰러져가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 집에서의 기억은 희미하다. 나는 늘 마당에서 놀았다. 담장과 대문이 낮아서 멀리 뿌옇게 보이는 도시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아마도 그게 ‘밖의 세계’라는 걸 어린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 말로는 내가 첫돌이 지나고부터 금식을 시작했다고 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또래보다 왜소하고 병약했던 걸 떠올리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어느 날은 흙으로 소꿉놀이를 하다가 진짜로 흙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그때 초록색 자동차 한 대가 집 앞에 섰다. 엄마는 맨발로 차에 올랐고, 차는 부르릉 소리를 내며 먼지를 날리고 달려 사라졌다.
그 집에서의 내 기억은 거기서 끝난다. 남은 건 뿌연 도시의 윤곽과 흙맛뿐이다.
결혼 직후 엄마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빠와 함께 서울을 떠나 어느 시골 마을의 쓰러져가는 폐가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혼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시작이었다. 왜 엄마가 결혼 직후 가족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끊고 단절된 삶을 택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다만 정말 신기한 사람은 아빠였다. 엄마 같은 신앙을 원한 또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두 분이 두메산골로 내려오기 전, 아빠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교실 벽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학생들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을 가르쳐야 했다. 상식적인 국민의례였다. 하지만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태극기에 예를 갖추는 것도 ‘우상숭배’로 여겨졌다. 아빠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자신만 묵념으로 대신했지만, 점차 아이들에게 우상숭배를 하도록 내버려 두는 죄책감이 커졌다고 한다. 결국 아빠는 어렵게 얻은 교사직을 버렸다. 그 결단 이후 아빠의 근본주의 신앙이 엄마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보건대, 엄마의 신앙은 맹목적인 건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의심할 줄 알았다.
학교 교장이었던 외할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일제강점기라는 현실 앞에서는 신앙보다 생존을 택했다. 학교를 유지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황국신민 교육을 시행하고 창씨개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는 거다.”
그게 외할아버지의 이유였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소신도, 의리도 없는 사람”이라며 그를 나무랐다.
그 갈등은 어린 엄마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믿음과 생존의 경계에서 어른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 자신은 타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나중에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단순히 종교적 이유로만 보기엔 너무 단호한 결정이었다. 그 시점부터 엄마와 아빠의 신앙은 제도권 교단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최덕지 여사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민족주의적 색채 속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외형을 빌렸지만 그 본질은 달랐다. 근본주의가 문자 무오주의와 배타주의, 정치적 극우로 기울어가던 시대에 그들은 반대편에 섰다.
“성경의 근본은 교리의 구속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자유다.”
그게 두 사람의 확신이었다.
그 신앙의 토대는 네 가지로 요약됐다.
성경의 근본주의, 친일 청산, 반유물론, 반유신.
이 네 가지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시대를 거스르는 생존 방식이었다.
6·25 전쟁 이후 나라는 잿더미 위에서 다시 세워졌지만, 그 기반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이념의 대립은 사람의 생명을 갈랐고, 신앙은 내면의 믿음이 아니라 국가 충성의 도구가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공산당을 미워해야 한다.”
교회의 강단에서는 성경보다 반공의 외침이 더 자주 울려 퍼졌다. 피난민의 눈물과 절망 위에 세워진 교회는 곧 정권의 그늘로 들어갔고, 권력은 교회를 이용했다. 목사들은 설교 대신 애국을 외쳤다.
엄마는 그 풍경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에게 신앙은 영혼의 자유를 위한 내적 투쟁이었는데, 세상은 그 자유를 복종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교회는 권력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고, 목사들은 성직보다 생존을 택했다.
그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교회를 떠났다. 신앙은 체제 밖에서 다시 시작됐다.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되, 본질을 문자에 가두지 않으려 했다. 세상의 탐욕과 권력과의 결탁을 죄로 여겼다. 그 신념은 시대와 역류했기에 고립됐고, 때로는 광신으로 오해받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앙은 타협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몸은 점점 고단해졌지만, 그 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야훼 신앙의 뿌리 위에 유대교와 이슬람의 율법적 전통을 더했다. 절제, 순결, 근면, 금식, 정결. ‘이방인보다 더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확신 아래 하루의 모든 행위를 신앙의 연장으로 여겼다. 밥 한 끼도, 숨 한 번 쉬는 것도 기도와 같았다. 결과적으로 엄마의 종교는 제도와 권위에서 벗어난 “극단적으로 순수한 신앙의 실험”이었다. 그러나 그 순수함은 가장 가혹한 고행이기도 했다. 그 고행 속에서 엄마의 몸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신념이 남았다. 그리고 나는 그 신념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났다.
교회의 형태가 굳어질 때마다, 그 옆에는 항상 새로운 금이 갔다. 엄마는 그 금을 따라갔다. 처음엔 작은 균열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틈은 새로운 신앙의 길이 되었다. 제도화된 교회가 세속의 언어로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엄마는 반대편으로 몸을 옮겼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재건진리회로, 그리고 다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길로.
그 여정은 마치 신앙의 탈피 과정 같았다 — 교리가 완성될수록 엄마는 그것을 의심했고, 교회가 커질수록 믿음은 더 좁은 길을 택했다. 결국 남은 것은 ‘따름’이 아니라 ‘분리’였다. 엄마에게 신앙은 조직에 속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수함을 되찾으려는 시도였다. 그 시도 속에서 하나의 독특한 종교철학이 만들어졌다.
성경 근본주의의 뼈대 위에 친일 청산의 윤리, 반유물론적 사고, 반유신의 시대정신이 결합되었다. 이름은 정치적이었지만, 엄마에게 그것은 영적 투쟁의 언어였다.
그녀는 이방인의 신앙보다 더 엄격히, 더 절제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기도와 금식은 의식이 아니라 생존의 문법이었다. 율법을 좇되 권력을 거부하고, 믿음을 붙들되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 그런 고독한 신앙의 틀 안에서 엄마는 자신만의 우주를 세웠다. 그 안에는 교회도, 목사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과, 그 앞에 홀로 선 인간만이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떠올리며 울었다. 어린 시절 내게 엄마는 단단하고 완고한 신앙의 상징이었다. 금식과 철야, 예배와 찬송으로 이어진 그녀의 삶은 나에게 끝없는 통제와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 속에서 나는 늘 숨이 막혔다. 그땐 엄마가 허황된 영생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혹사시키고 나까지 끌어들이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 믿음은 사랑이 아니라 광신처럼 보였고, 신앙은 구원이 아니라 속박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단순한 맹신이 아니었다. 엄마는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붙잡고자 했던 것이다. 병든 몸과 무너져가는 삶 속에서 그나마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기둥이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도시를 떠나기 전, 교회의 균열과 비난, 분열을 지켜보며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교회를 움직이는 건 신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이라는 걸. 그 깨달음이 그녀를 더 깊은 고독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산골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엄마는 ‘소속되지 않음’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교회라는 틀을 벗어나 홀로 하나님을 향하려는 길은 어쩌면 가장 외롭고 두려운 길이다. 그러나 그 고독 속에서 엄마는 신앙의 본질을 다시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자각이었고, 굴종이 아니라 자유였다.
나는 그런 엄마의 그림자를 밟으며 자랐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나는 나만의 철학을 세울 수 있었다. 누구의 말에도 휘둘리지 않는 신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 믿음이란 정답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고 묻고 깨닫는 과정이라는 걸 엄마를 통해 배웠다. 결국 엄마가 내게 남긴 유산은 신앙이 아니라 ‘깨어 있는 의식’이었다. 다만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도 길고 고통스러웠을 뿐이다.
아브라함은 바벨탑을 떠나 광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기존의 신앙과 질서의 껍질을 벗기며 신앙의 본질을 찾아 헤맸다. 그 길의 끝에는 사랑하는 자식을 재단에 올려야 하는 잔혹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우르성을 떠난 롯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아브라함은 끝없는 광야로, 롯은 다시 도시로—바벨탑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안다. 엄마는 나를 학대한 게 아니었다. 나를 제물로 바친 것도 아니었다. 나를 단련시킨 것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가 다시 바벨탑으로 돌아가려 할 것을. 그래서 그 길을 미리 막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무너진 탑의 폐허 속이 아니라 광야의 끝없는 모래사막과 별들 사이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길을 보았다.
- 죽음의 문턱 시리즈는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