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제27화.
-죽음의 문턱 시리즈 세 번째-
엄마는 1남 5녀 중 막내딸이었고, 그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다. 엄마와 외삼촌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우애가 깊었다. 종교적 신념과 삶의 철학도 함께 나누던 사이라 했다. 그 시절에는 ‘마마’라 불리던 천연두가 유행이었고, 예방주사 보급도 쉽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천연두를 앓으며 큰 고생을 했다. 나는 어릴 적 수두를 앓은 적이 있다. 가려움에 미간의 딱지를 떼어내서 지금도 작은 자국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병의 고통보다 더 큰 건 완치 후의 상처였다. 얼굴 전체에 남은 곰보 자국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깊었고, 그 흔적은 자신감을 앗아가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으며 사회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엄마는 결혼 전 방사선 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자국을 지웠지만, 그 대신 수술 부위가 울퉁불퉁해지는 켈로이드가 남았다. 아마 그 병을 함께 겪은 시간이 두 사람을 더욱 각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외출을 꺼리고 세상과 거리를 두며, 대신 함께 기도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을 테니까.
삼촌은 결혼 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문 앞에서 벨이 울리면 나는 문 너머로 외쳤다.
“누구세요?”
“춘삼이다~!”
목소리는 분명 삼촌인데, 이름은 이상했다.
“엄마, 목소리는 삼촌인데 자꾸 춘삼 이래!”
엄마는 웃으며
“삼촌인가 보다” 하며 문을 열러 나갔다.
나는 엄마 치마 속에 숨어 삼촌이 “춘삼이다~!” 하고 놀라게 하면, 그제야 웃으며 뛰어나왔다. 그때부터 삼촌을 춘삼이라고 불렀다. 삼촌은 나를 유난히 잘 챙겼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직장까지 얻었지만, 틈만 나면 한국에 왔다. 그럴 때마다 가방은 선물로 가득했다. 나는 장난감을 구경하고 과자를 먹으며 신이 났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삼촌은 독일에서 숙모를 만나 결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도저히 이 사람하고는 못 살겠어. 신앙도 안 맞고, 고집이 너무 세. 숨이 막혀.”
엄마는 단호했다.
“이혼은 절대 안 돼. 참고 살아. 하나님이 맺어주신 인연이야.”
엄마는 평소 숙모를 고마워했다.
“얼굴이 저런데도 집신도 짝이 있다더니, 결혼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렇게 말하며 자주 웃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숙모를 삼촌이 먼저 버리려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숙모가 무슨 큰 잘못을 하지 않고서야 삼촌이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숙모는 오랜 시간을 버틴 것이었다. 삼촌의 끝없는 기도와 신앙생활, 잦은 금식기도, 그리고 끊이지 않는 신앙적 잔소리와 규율.
그 모든 것을 견디며 두 아이를 키워야 했다. 그런 숙모가 어느 날, 삼촌에게 반기를 들었다. 자식 교육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삼촌은 엄마와 같은 신앙철학을 지켰다.
일요일 하룻금식, 월초 금식기도, 잦은 3일 금식.
돼지고기와 오리고기는 먹지 않았고, 일요일에는 전깃불도 켜지 않았다. 우상숭배를 상징한다 여긴 해태나 별자리 모양의 상표는 물론, 다른 교단이 운영하는 사업체 물건조차 쓰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렸지만, 도대체 이런 규율이 신앙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전혀 체감하지 못하겠다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그것을 정결하게 살기 위한 의도라고 얘기했지만 그렇게 까지 해야 되냐고 묻기도 했다.
숙모는 남편의 신앙생활에 어느 정도 동참했지만,
아이들에게 믿음은 강요가 아닌 ‘선택’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이
아이들을 세상 속에서 위축되게 만들지 않을까 늘 걱정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숙모의 딸 — 그러니까 내 사촌동생은 결혼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우리 집의 신앙 이야기는 절대 신랑에게 하지 마세요." 부모의 신앙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 내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건 죽기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숙모의 교육이 통했는지, 그 집 아이들은 모두 쾌활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됐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평화로운 가정. 반면 나는 결혼할 때 와이프에게 우리 집의 신앙 내력을 숨기지 않았다.
제사에도 절하지 않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요구했다. 물론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나 역시 숙모처럼 내 아들에게 신앙적인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은 부모님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동안 무신론에 깊이 빠져들었다. 유럽을 암흑으로 몰아넣은 기독교의 역사, 신앙의 명예를 내세운 십자군의 이권 다툼, 예수회의 일본 진출이 불러온 임진왜란의 불씨, 아기 예수를 앞세운 유럽인의 식민 침탈까지— 그 뒷간 같은 역사에 매료된 시기였다. 심지어 나는 최초의 교회 체인사업에 성공한 ‘일곱 교회’의 교주, 바울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엄마의 신앙 그늘에 갇혀 보지 못했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기독교의 추악한 실태를 그 민낯을, 지식과 사유로 모두 열어젖히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탐구와 비판이 결국엔 한 가지로 귀결된다는 것을.
세상에는 정답이 없고, 다만 수많은 관점과 방식이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내게 주어졌던 유년기 또한 그 다양성의 한 조각이었음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엄마는 삼촌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불렀다. 당시 어린 내가 보기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장난꾸러기 삼촌이 뭐가 사자란 말인가. 저승사자라도 된단 말인가, 하고 웃음이 나왔다. 사실 엄마 말로는 삼촌이 목사라는 뜻이었다. 자신들의 신앙을 나름 체계화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몇 명 되지 않는 신도들이 모여 목사니 성도니 하는 것이다.
내 눈에는 엄마가 거의 대장이었는데, 삼촌을 자꾸 존대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삼촌은 “그런 거 안 해도 돼”라며 웃지만, 짐짓 근엄한 얼굴로 가정예배를 주재하고 설교를 하곤 했다. 그 시간이 힘들기도 했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 근엄한 표정과 기도하는 모습이 묘하게 흥미로웠다.
엄마는 삼촌이 집에 와서 함께 기도하면, 꼭 맛있는 것을 준비했다. 나는 그저 구경만 했다. “목사님은 좋은 걸 먹어야 한다”는 엄마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뒷전이 되었다. 하지만 삼촌은 그걸 거의 먹지 않고 다 남기고 갔다. 아마 나에게 주려고 그런 것이었을 거다. 엄마는 예수님을 믿는 건지 삼촌을 믿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엄마의 폐결핵 후유증과 잦은 금식기도는 그녀의 건강을 최악으로 몰았다. 결국 엄마는 내가 서른다섯이던 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엄마의 죽음은 나를 혹독한 내면 갈등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엄마를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넣은 것은 결국 엄마 자신이었고, 그 문턱에서 다시 돌아와 수십 년을 살아간 것도 엄마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모든 책임을 교주 같은 삼촌에게서 찾고 싶어 했다.
그런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계기는, 엄마의 죽음 직전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엄마는 늘 믿음이 전부였다. 세상의 이치보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였고, 돈이나 집,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은 다 부질없는 헛된 욕망이라 여겼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나는 어쩌면 ‘세속적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었다. 결혼 후 처음 장만한 24평짜리 아파트는 나에게 성취의 상징이었고, 가족에게 안정감을 주는 터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부동산 시장도 요동쳤다. 아파트 값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름의 판단으로 더 넓은 30평대 아파트를 하나 매입했다. 언젠가 오를 거라 믿었고, 그때 팔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세상 재물에 욕심을 내면 안 돼. 부동산 투자는 탐심이야. 둘 중 하나는 팔아야 해.”
나는 최대한 차분히 설명했다. “엄마, 이건 욕심이 아니야. 단지 갈아타기 위한 거야. 자산을 불리려는 게 아니라, 실거주를 옮기려는 거라고. 지금 팔면 손해가 커서 좀 기다리려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신앙을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의 세계에서는, 세속적 계산이라는 게 죄와 다를 바 없었다.
며칠 뒤, 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지금이라도 팔아라. 앞으로 집값은 더 떨어질 거야. 네가 욕심을 버려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나는 참았다가 조심스레 반박했다. “삼촌, 시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조금만 지켜보면 회복될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삼촌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지금 팔면 손해가 얼마나 되지?”
“대략… 삼천만 원 정도요.”
“그럼 내가 줄게. 팔고 계약서만 가져와라.”
그 말에 나는 잠시 흔들렸다. 금전적인 손실을 메워주겠다니, 어쩌면 이것도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인가 하며 위로받고 싶었다. 결국 나는 삼촌의 말을 믿고 매매 계약을 진행했다. 그러나 계약 후 삼촌이 말을 바꿨다.
“내가 주는 게 아니라, 이모들이 조금씩 모아서 주기로 했어.”
그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였다. 지금 그 돈이 없으면 전세계약도 할 수 없고, 돌려줄 보증금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황급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삼촌한테 거짓말 좀 시켰다. 네가 집을 팔게 하려고.”
그 말에 나는 무너졌다. 배신감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손해를 감수한 것도 억울했지만, 믿었던 가족이 나를 속였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결국 나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삼천만 원을 빌려 메웠다. 그 사건 이후로 엄마와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엄마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다. 금식기도와 폐결핵 후유증이 겹쳐,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나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임종 자리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함과 분노, 허망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동시에 엄마를 그렇게 몰아붙인 삼촌이 미웠다.
“엄마를 말리지 그랬어요. 금식으로 몸이 망가지는 걸 알면서 그냥 두셨어요? 엄마가 신앙에 눈이 멀어 나에게 분별력 없는 판단을 유도하는 걸 알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나한테 거짓말해서 이간질을 시켰어야 했나요?”
장례가 끝난 뒤, 나는 삼촌을 찾아가 쏟아냈다.
“교회가 사람을 살려야지, 죽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목사라면 그 정도 분별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엄마에게 신대접, 왕대접받으니까 너무 좋았나요?”
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이고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 침묵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며칠 뒤, 삼촌이 40일 금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님을 따라가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그건 신앙이 아니라 자살이야. 하나님 이름으로 행하는 살인행위라고.” 그렇게 분노했다. 그러나 분노의 끝에는 슬픔이 있었다.
결국 삼촌은 금식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삼촌의 빈소에 찾아가 오열했다.
“미워했던 건 삼촌이 아니라, 삼촌이 한 짓이었어요.”
어릴 적 춘삼이의 추억이 되살아나며 미안함이 몰려왔지만 삼촌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렇게 엄마와 삼촌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각자의 믿음의 방식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
나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렸다. 엄마가 떠난 뒤 몇 해를 그렇게 살았다. ‘그때 단 몇 년만이라도 엄마 뜻대로 사는 척이라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신앙과 그 광신의 경계는 언제나 사과껍질 보다 얇고, 그 속에서도 엄마는 자기 나름의 진심으로 살았다.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세계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신념의 세계였지만, 그 신념이 그들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은 같은 신앙으로 삶을 지탱했고, 같은 믿음으로 죽음을 건넜다.
나는 그 뒤에 남겨져, 그 신앙의 그림자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증인이 되었다.
ㅡ 죽음의 문턱 시리즈 네 번째에서 계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