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가 말하는 시공간의 대한 암호
나는 지금까지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라는 연재를 통해, 고대 문서인 [창세기] 속에 숨겨진 암호를 풀어내려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창세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상상보다 먼저 교회의 종소리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창세기]는 종교의 경전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신의 존재나 종교적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라는 고대 기록의 가치를 탐구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당시의 과학과 수학이 덜 발달한 상태에서, 우주의 생성 원리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상징과 신화의 언어로 기록한, 일종의 [우주의 매뉴얼]이다.
이 문서는, 종교 체계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쓰였으며,
우주의 근원과 인간 의식의 관계를 관찰하고 체험한 고대인의 통찰을 담고 있다.
나는 그것이 극도로 발달한 초고대 문명으로부터 전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된다.
“고대인들은 어떻게 우주의 찰나를 인식하고 기록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제27화, 나는 초능력자다]에서 이야기한 퀵실버의 능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총알이 공중에 떠 있는 순간, 물방울이 허공에서 멈춰 있는 순간, 그 속에서 그는 자유롭게 움직인다.
우리는 그가 엄청나게 빠르게 이동한다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 그는 [시간을 늘려 인식하는 능력]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능력은 인간 모두가 가진 잠재적 능력의 은유이기도 하다.
우주는 찰나에 생겼지만, 인간의 의식은 그 찰나를 수십억 년, 정확히는 150억 년으로 ‘늘려서’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느리게 살아가지만, 동시에
우주의 찰나를 현미경처럼 확대하여 관찰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은유에만 그치지 않는다.
[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 보는 시간과 공간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간은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간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이 느려진다. 단순히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간이 “팽창”하거나 “지연”된다는 것이다. 속도가 빛에 가까워지면, 이론적으로 시간이 거의 멈추거나 ‘0’에 다다른다.
그리고 상상해 보라. 만약 우리가 빛과 함께 질주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을 멈춘 채 우주의 모든 순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빛의 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우주의 모든 사건이 한 장면처럼 겹쳐서 동시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150억 년이라고 부르는 우주의 역사도 빛에게는 “짠!” 하고 지나가는 단 한순간, 0초에 불과할 수 있다.
이제 여기에 더해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시간만이 아니라 공간도 상대적이다는 사실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한 조항인 ‘길이 수축(length contraction)’이 그것이다. 움직이는 물체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될수록 그 물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의 길이(공간 거리)가 외부 관찰자에게는 짧아져 보이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빛의 속도에 다가가면 공간이 점점 수축해서 ‘0’에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즉, 시간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도, 속도라는 조건에 의해 극단적으로 변형될 수 있는 구조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공간의 거리는 줄어들고, 빛의 속도에 이르면 이론적으로 공간 거리도 0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앞쪽’, ‘뒤쪽’, ‘멀리’, ‘가까이’라고 구분하는 그 모든 인식은 무엇에 기초한 것인가?
바로 빛이 나에게 도달하는 속도와 시간이다.
빛이 나에게 일찍 도착하면 “가까이 있는 존재”로 느껴지고, 나에게 늦게 도착하면 “멀리 있는 존재” 또는 “뒷면”으로 느껴진다.
즉, 빛과 어둠의 관계 — 빛이 곧 닿는 면, 빛이 닿지 않는 면 — 이 바로 입체 공간을 인식하게 만드는 틀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물체를 볼 때, 정면이 선명하게 보이는 이유가 그쪽에서 온 빛이 우리에게 먼저 도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물체의 뒷면은 빛이 차단되거나 늦게 도달하기 때문에 어둡고 형태가 덜 드러난다. 이 미세한 ‘빛의 도달 시간 차이’가 곧 우리가 인식하는 거리와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결국 우리가 느끼는 공간 자체가, 빛이라는 속도를 기준으로 한 시간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창세기 - 첫째 날
그렇다면 창세기는 이 빛의 비밀을 꿰뚫고 있을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이 장면은 우주의 첫 ‘인식’이 시작된 순간, 다시 말해 의식의 탄생을 상징한다.
이전까지 우주는 어둠, 즉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은 무(無)의 상태였다. 과학이 말하는 초기의 초대칭상태, 창세기가 말하는 혼돈, 공허, 흑암, 수면. 그러나 ‘빛이 있으라’는 명령과 함께 처음으로 구별이 생겼다. ‘보는 것’이 가능해졌고, 우주는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빛이 닿는 면과 닿지 않는 면이 구분되면서 앞과 뒤, 안과 밖이라는 입체감이 생긴다. 다시 말해, 빛의 존재는 밝고 어두운 차이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공간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정면이 선명하고 뒷면이 어두운 이유도 빛이 도달하는 속도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곧 깊이감과 거리감을 만들어내며, 인간이 ‘공간’을 느끼게 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이 기준이 되면서 ‘변화’가 생기고, 그 변화의 주기가 곧 시간으로 인식된다. 어둠에서 빛으로, 다시 어둠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우주는 처음으로 “순환”이라는 개념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시작이며, 엔트로피의 방향이 정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창세기의 첫째 날은 우주가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빛은 의식의 출발점이며, 시간과 공간, 존재의 틀을 만들어낸 근원이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곧 “우주야, 너 자신을 보아라”라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양자 코히런스
또한, [양자 코히런스]는 입자가 서로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파동처럼 연결되어, 여러 상태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의식이 동시다발적인 가능성을 하나의 현실로 응축해 내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의식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시간의 흐름과 현실의 체감이 달라진다.
양자 코히런스를 조금 더 쉽게 풀어보면 이렇다. 멀리 떨어진 입자들이 마치 “야, 나 여기 있어!” 하고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동시에 여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거다. 쉽게 말해, 입자들이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큼은 손 잡고 춤추는 친구들처럼 연결돼 있는 거다.
이걸 우리 인간의 의식에 빗대면 더 흥미롭다. 우리의 머릿속도 사실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굴리고 있지만, 결국 ‘오늘 뭐 먹을까?’ 같은 작은 선택부터 인생의 큰 결정까지, 하나를 선택하면서 현실을 만들어낸다. 즉, 의식이라는 건 마치 수많은 TV 채널을 동시에 틀어놓고, 그중 하나만 골라 보는 리모컨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집중하느냐에 따라 시간과 현실이 달라진다. 같은 하루도 어떤 사람은 느릿느릿, 어떤 사람은 번개처럼 지나간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의식은 단순히 현실을 바라보는 창이 아니라, 현실을 스스로 찍어내는 영화감독 같은 존재인 셈이다.
빛은 바로 이 비밀의 열쇠다.
빛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빛의 속도에서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빛의 언어로 세상을 관찰한다면,
모든 사건이 동시에 존재하며,
변화는 단지 우리의 인식 속도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는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빛이 생기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 되었다.
그 순간, 우주에 시간의 기준이 세워졌다.
빛이 생긴 즉시,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의 틀이 열렸고,
그 순간이 바로 첫째 날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여섯 날 또한 날짜의 반복이 아니었다.
그 일곱 번의 저녁과 아침은 해가 뜨고 지는 하루의 주기가 아니었다.
시간의 결이 서로 겹치며 일곱 번의 찰나가 진동했고,
그 중첩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우주를 만들어냈다.
그 일곱 번의 찰나, 일곱 겹의 순간이 모여
현재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 구조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우주를 더 세밀히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다.
공간이 팽창하면서 빛이 이동해야 할 거리가 늘어나듯,
우리의 의식 또한 점점 더 넓게, 세밀하게 펼쳐진다.
우주는 프랙탈적 주기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며
자신의 해상도를 높여간다.
우주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 거울이 곧 인간의 의식이다.
여섯 번째 찰나에 복제의식이 등장한다
마지막 일곱째 날, 즉 7번째 찰나, 우주는 안식에 들어간다.
이 안식은, [자기완성의 단계]다.
우주는 이제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을 바라볼 눈을 갖게 된다. 성경은 이것을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우주는 인간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고, 그 복제를 통해 자기 인식을 완성한다.”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난다 —
이 말은 상대성과 양자물리학이 모두 암시하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의식은 우주의 가장 느린 진동이며,
우주의 기억이 스스로를 재생하는 통로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는 퀵실버의 능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그 속도를 인식의 각도에 따라 바꿀 수 있다.
총알이 날아가는 찰나를 여유롭게 바라보듯,
우리는 우주의 순간을 늘려 이해하고, 선택하며, 창조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우주는 우리 안에서 깨어난다.]
ㅡ 나는 초능력자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