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신은 허상이다.
- 죽음의 문턱 시리즈 네 번째 -
내가 다섯 살 쯤이었다. 늦은 오후, 집 안에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으려는 그때였다.
우리 집 초인종이 띵동, 띵동 울렸다.
엄마는 갑자기 다급한 얼굴로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너 여기서 문 잠그고 있어. 엄마가 부르기 전까지 절대 나오면 안 돼.”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엄마 말대로 방 안에 남았다.
그리고 방문에 귀를 대고 바깥의 소리를 살폈다.
그러자 남자의 조금 쉰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아이를 보여다오. 나 전도하러 온 거 아니다. 그냥… 아이만 보면 돌아가겠다.”
그 목소리에 나는 약간 겁이 났다. 그래서 문을 아주 살짝 열어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 남자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거의 무릎을 꿇듯한 자세로 서서 엄마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말했다.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칼날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여기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우리는 끝났습니다. 회개하기 전까지는 아이를 볼 수 없습니다.”
남자가 돌아가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남자는 나의 친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그날 본모습이 친할아버지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느 날, 아빠가 회사 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집을 며칠 정도 비웠다.
아빠가 출장을 간 사이, 어느 날 밤에 나는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울면서 “못 살겠다”는 식으로 푸념을 하고 있었고, 마치 결혼을 괜히 했다는 듯한 말들을 중얼거렸다.
나는 엄마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의 어깨를 붙잡고 울지 말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내 위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계속 울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가 그날 울었던 이유는 아빠가 출장을 간다고 말하고서는 사실 아빠의 가족들을 만나러 갔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한 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빠의 가족들과는 절교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할아버지의 뒷모습 말고는 친가 식구들을 본 적이 없다.
나에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세계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들과 삼촌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외할아버지가 폐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감정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외할머니와 큰 이모는 평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지만, 외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 슬픔과 분노를 엄마와 삼촌에게 쏟아냈다.
외할아버지가 병으로 고생하다 일찍 돌아가신 것은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와 삼촌의 도를 넘어선 신앙생활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웠고, 그 스트레스로 힘들어하셨다는 것이었다.
엄마와 삼촌은 극도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들의 신념을 부정당했다는 느낌을 받자, 그것을 신앙을 위협하는 사탄의 역사라고 여겼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신앙으로 인한 가족 간의 불화와 절교를 경험하게 되었다.
사랑하던 외할머니, 큰 이모, 사촌형을 그 뒤로는 거의 만나기 어려워졌다.
스무 살이 되자 나는 집에 들어가는 날이 점점 줄었다.
학업이나 일을 핑계로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엄마의 슬하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던 어느 청춘의 날—오랜만에 집에 갔다.
그날은 엄마와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하게 서글픈 마음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놀라서 왜 우느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이제 집에 오지 말라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 왜 그런 생각을 해?”
“글쎄… 내가 이렇게 엄마 말도 잘 안 듣고, 엄마처럼 투철한 신앙생활도 안 하고, 그냥 내 마음대로 하니까… 그럴 것 같아서.”
엄마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울지 말라고 나를 안아주었다.
하지만 사실, 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적, 가정예배를 하면서 성경 출애굽기 이야기를 자주 설교했다.
특히 모세가 신의 언약을 받으러 시나이 산에 올라간 지 40일째 되던 날의 장면을 반복해서 들려주곤 했다.
광야에 홀로 버려졌다고 느낀 히브리인들이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주물로 떠 축제를 벌이던 이야기.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들고 있던 돌판을 깨뜨리고, 우상숭배자들을 처형한다.
그 처형 장면은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가족이 가족을, 아비가 자식을, 자식이 아비를, 형제가 형제를 향해 서로 칼끝을 겨누어야 했다.
또 사제들에게는 금송아지를 가루로 빻아 그 가루를 물에 타 마시게 했다.
엄마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신앙을 강조했다.
세상의 모든 법도와 윤리는 하나님의 율법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식이었다.
신앙심에는 강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오래도록 이 장면을
신의 잔혹함, 질투에 사로잡힌 신적 분노, 죄인에게 내리는 무자비한 징벌로만 읽어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들여다보니, 그 우상 숭배 처단의 서사는 오히려 엄마의 절교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잠시라도 신앙의 방패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을까.
가족에게 등을 돌리게 만드는 선택이
‘신앙의 순수한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을까.
그 실체는 결국 비뚤어진 해석, 그리고 오래 누적된 오해의 그림자였다.
사실 이 장면은, 신앙을 가진 이들뿐 아니라 종교를 비판하는 이들까지도 쉽게 미끄러지는 지점이다.
누군가는 이를 근거로 신의 본성을 잔혹하다고 단정하고,
또 누군가는 이 광경을 ‘강인한 믿음의 상징’이라며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읽기는 모두
정작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지점을 비껴간 오독에 가깝다.
모세가 금송아지상을 곱디고운 가루로 빻아 물에 섞어 사람들에게 마시게 했던 그 장면은, 단순한 징벌의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그 행위가 지닌 상징은 분명하다. 성경 곳곳에서 반복되듯, 굳어버린 마음—오랜 관습에 갇혀 새로운 약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에 대한 경고이자 훈계였다. 히브리인들은 모세가 새로운 언약을 전하려는 바로 그 순간, 다시 옛 습관으로 되돌아가 금송아지를 세웠다. 모세는 그 단단한 신념을 가루로 빻아 물에 타 마시게 함으로써, ‘굳은 것은 부서지고, 유연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교훈을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형제간 가족 간에 우상숭배자를 처단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살육 이전에, 강퍅한 신념이 인간관계를 단숨에 끊어버릴 수 있다는 비극적 상징이다. 신앙이 사랑을 가르고, 가족을 산산이 흩어놓을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엄마의 극단적인 신앙이 불러온 가족 간의 절교, 그리고 그 절교를 피해 각자 이중적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집의 슬픈 풍경은, 사실 어느 한 집안의 사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곳곳에서,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모세의 그 장면을 ‘신앙의 절정’으로 오독하며 사람을 정죄하고, 사랑을 끊고, 관계를 도끼처럼 내리치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제야 묻는다.
그 절교는 정말 신이 원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오해였을까.
창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이 말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비추는 존재라면, 신 역시 단일한 모습이 아니라 여러 속성을 품은 존재라는 뜻이 된다. 인간이 다양한 감정과 이성과 상상력을 지닌 것처럼, 신의 형상 또한 본래 다층적이고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오래된 신앙 전통은 종종 그 풍부함을 지워버리고, 신을 단 하나의 성질—단호함, 질서, 혹은 분노—안에 가두려 한다. 이것이야말로 창세기의 메시지를 좁게 오해한 결과다.
일부에서는 히브리어 엘로힘의 복수형을 단순히 ‘신성의 강조’라고 설명하지만, 그 자체가 신의 복수적 속성을 은근히 인정하는 셈이다. “우리의 형상”이라는 말은 이미 신적 다양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다양한 관점과 문화, 사고방식을 필요로 하는 것도 이와 닮았다.
인간을 창조한 존재와 인간의 속성이 본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동일한 결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엄마의 절교 역시, 하나의 확신에 마음을 고정시키려 한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신의 형상이 본래 다층적이라는 창세기의 말처럼, 신앙도 마땅히 여러 가능성을 품은 채 숨 쉬어야 한다. 그런데 신앙을 하나의 원리, 하나의 감정, 하나의 질서 속에 가두는 순간—그 마음은 스스로를 돌처럼 굳혀버린다.
우주는 단 한 번도 하나의 모습에 머문 적이 없다. 별은 태어나고, 부서지고, 다시 흩어진 먼지로부터 새 세계가 만들어진다. 변화는 우주의 본성이고, 유연함은 존재의 조건이다. 굳어버린 마음은 그 흐름에서 벗어나는 순간 금세 금이 가고, 결국 부서져 버린다.
신앙도 다르지 않다. 신을 한 가지 성질로 규정하고, 그 규정을 인간에게 강요할 때—사랑은 단절되고, 관계는 산산이 무너진다.
그러나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본래 다양한 감정과 사고를 품고 태어났듯, 신앙도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고, 파도처럼 끝없이 새로워질 수 있다. 굳어 있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었던 그 상징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돌이 되지 말고, 물이 되어라.”
오해에서 비롯된 절교가 또 다른 절교를 낳지 않도록,
신앙은 단단함보다 유연함으로, 확신보다 성찰로.
- 죽음의 문턱 시리즈 다섯 번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