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는 왜 "물"을 나누기도 하고 모이게도 하는가. 물이란?
창세기 해례본 1 https://brunch.co.kr/@anymoonmuimui/2
내 연재북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1권~2권]이 말하려는 핵심은 분명하다.
창세기 속 천지창조가 과학의 시간축과 맞지 않는다는 통념은, 사실 그 문자에 숨겨진 암호적 구조를 해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반대로, 성경의 무오성을 지나치게 절대화한 나머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의 세계 설명서로 고착시키면, 그 문자들이 가리키는 상징의 지층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논리의 늪에 빠지는 일 역시 흔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창세기는 신화적 상상력의 잔재도 아니고, 종교적 전통이 만들어낸 판타지도 아니다.
그것은 고대의 언어라는 오래된 매개를 통해 기록된 우주 생성의 공식, 일종의 ‘우주론적 암호문’이다. 그리고 그 공식의 최종 단계에는—우주 의식과 인간 의식이 왜 태어났는지, 존재가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설계된 이유가 무엇인지—그 근원적 물음에 접근할 수 있는 문이 숨겨져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창세기라는 이 우주 공식은 특정 종교의 목적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주에서 태어난 모든 지적 존재에게 돌아가야 할 보편적 사유의 유산, 그들에게 열려 있는 더 크고 더 깊은 꿈에 가깝다.
지난 화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첫 장면을 다시 펼쳐보며, 그 오래된 문장 속에 숨어 있던 우주의 원초적 풍경을 따라가 보았다.
혼돈의 깊음 위에 펼쳐진 얇은 2차원의 경계—그 ‘수면(surface)’이 단순한 지구의 바다가 아니라, 우주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정보의 막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표면을 스치듯 지나가는 에너지의 미세한 흔들림이 어떻게 현대 우주론의 홀로그래피 원리와 기묘하게 닮아 있는지를 짚어보았다.
우주의 가장 초기 순간이 하나의 ‘표면’ 위에서 일어났다는 그 통찰은, 인간 의식 또한 뇌 표면이라는 얇은 층에서 빛을 얻는다는 사실과 은밀히 겹쳐지며—우주와 인간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창세기의 미묘한 결말과 맞닿아 있었다.
오늘은 그 여정의 연장선에서, 다시 창세기 첫 장면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는 장면,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갈라지며 궁창이 서는 순간,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침내 뭍이 드러나는 풍경까지—
창세기의 창조 서사 전체가 왜 이토록 ‘물’로 둘러싸여 있는지, 그 이유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번 화의 첫 질문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깊음 위에 있다.
창세기가 말하는 ‘물’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가?
고대 언어의 물결 속에서 우주의 첫 리듬이 어떻게 출렁였는지, 그 상징의 문을 오늘 함께 열어보려 한다.
히브리어에서 ‘물’을 뜻하는 [마임 : מים]이라는 단어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물과는 결이 다르다. 컵에 담기거나, 강으로 흐르거나, 바다로 출렁이는 그런 물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고체/기체/액체의 구분도, 위와 아래의 방향성도, 심지어 ‘물’이라는 이름조차 붙기 이전의, 끝도 바닥도 없는 순수한 잠재성의 덩어리. 그래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수면 위”, “위의 물”, “아래의 물”, “물이 한 곳으로 모인다”는 표현은 실제로 어떤 액체적 풍경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우주가 구조를 갖추기 시작하는 과정을 고대인의 언어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창세기의 첫 장면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의 그 수면은 마치 우주의 무한한 심연 위로 잠깐 떠오른 얇은 막, 혹은 최초의 경계면(surface)에 가깝다. 이 경계가 생기면서 둘째 날에는 위와 아래가 구분되고, 두 층으로 나뉜 ‘물’은 더 이상 혼합된 잠재성이 아니라 구조를 가진 공간, 즉 우주가 된다. 물이 한 곳으로 ‘모인다’는 말은, 지구의 바닷물이 웅덩이로 흘러드는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 초기에 혼돈의 에너지 바다 위로 중력이 태동하며, 밀도의 미세한 차이가 중력 우물을 만들고, 그 우물로 에너지와 원시 물질이 자연스레 모여드는 거대한 구조화의 순간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모임’이란 물질세계의 뼈대를 이루는 중력의 그물망이 처음으로 자리 잡는 사건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이런 인식은 히브리 성서만의 독특한 발상이 아니다.
전 세계의 신화 속에서, 태초의 우주는 놀라울 만큼 비슷한 모습으로 어두운 물, 끝없는 물, 형체 없는 물로 출발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티아마트가 짠물과 민물이 뒤엉킨 무한한 아비스(abyss)였고, 신들은 이 혼돈의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이집트의 눈(Nun)은 시간·공간·빛이 모두 생기기 전, 신들이 웅크린 채 잠들어 있던 암흑의 원초적 바다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케아노스는 세상의 경계를 이루는 순환적 원형의 물, 모든 신들의 배경이 되는 존재였다.
인도의 리그베다에서는 더욱 대담하다. 존재도 없고 비존재도 없는 상태에서, 어둠 아래에 감춰진 물 없는 물, 개념으로도 붙잡히지 않는 태초의 심연이 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중국의 혼돈 개벽 신화에서도, 세상이 열리기 전에는 음양이 분리되지 않은 탁한 기운의 바다가 우주의 원형으로 제시된다.
서로 지리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고대인들은 하나같이 ‘태초의 물’을 우주의 시작점으로 그려냈다.
왜일까?
그들에게 ‘물’은 무언가가 태어나기 이전의 원형적 에너지, 경계도 규칙도 이름도 없는 근원적 혼합물이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면 흔들림대로 형태가 바뀌고, 닿으면 닿는 대로 갈라지고, 눌리면 눌리는 대로 모이는 물의 성질은, 고대인들에게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비유로 완벽했다.
그래서 고대 우주론에서 ‘물’은 "H₂O"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생겨나기 직전의 모든 가능성, 질서 이전의 심연, 형태를 기다리는 그림자 같은 바탕이다.
창세기의 수면도, 티아마트의 바다도, 눈의 심연도, 리그베다의 이름 없는 바다도—모두 같은 사실을 말한다.
우주의 시작은 혼돈을 품고 있는 깊은 물, 그 물이 갈라지고 모이고 정렬되며 비로소 세계가 눈을 뜬다는 이야기. 고대인들은 그 심연을 물이라고 불렀을 뿐, 사실 그 물은 우주가 자기 자신을 조직하기 직전의 첫 재료였다.
우주의 시작, 홀로그램 우주론이 암시하듯, 《두께도 없고 형태도 없는 얇은 정보막》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창세기가 말하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표현은 바로 그 막을 감싸고 있던 《원초적 심연》, 《아직 아무것도 분리되지 않은 태초의 에너지 바다》를 가리킨다. 그 수면은 빛도, 구조도 없었지만, 우주 전체의 잠재 정보가 응축되어 있던 《‘0차원의 경계’》였다.
첫째 날, 광자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는 순간—우주는 최초의 《장대한 빛의 폭발》을 겪으며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빛의 해방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라, 우주가 처음으로 《입체적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평평하게 존재하던 수면은 빛과 함께 《구형의 정보막》으로 부풀어 오르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팽창하는 우주의 시초가 된다.
그 잔향은 여전히 우주 곳곳에 남아 있으며, 약 150억 년 전의 그 첫 빛은 식지 않은 여운처럼 《우주배경복사(CMB)》로 남아 오늘까지 도달한다. 그것은 마치 둘째 날의 《궁창이 서는 장면》을 지금도 들려주는 오래된 영상과 같다.
여기서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자연스럽게 실체를 드러낸다. 히브리어의 물이 ‘미분화된 잠재성’을 의미한다면, 궁창 위와 아래로 나뉜 물은 그 잠재성이 《두 층의 우주로 분리된 상태》를 나타낸다.
[궁창 위의 물]
빛과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우주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암흑물질·암흑에너지의 세계. 관측할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우주의 형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 바다.
[궁창 아래의 물]
빛과 상호작용하며,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얇은 5% 미만의 세계. 별, 원자, 행성, 생명까지 포함된 ‘보이는 세계’가 여기에 속한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우주의 두 층을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라 표현했다. 물은 ‘우주를 구성하는 원초적 재료’였기에, 두 층 또한 물로 비유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 단순한 비유 뒤에 과학적 사실과 우주의 실체가 겹쳐 있다는 것이다. 초기 우주의 《미세한 밀도 요동》은 시간이 흐르며 중력의 작용으로 증폭되어, 현재 우리가 보는 은하와 은하단을 연결하는 《우주 거대 구조, 즉 우주의 그물망(Cosmic Web)》 을 만들었다. 이 그물망의 필라멘트를 따라 은하들이 배열되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세계다.
내 이론에 따르면, 초기의 정보 막은 마치 《파문이 수면 위에서 만들어내는 요철 무늬》처럼 우주의 원초적 정보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때 고대 히브리어 메라헤페트—새가 알을 품으며 미세한 떨림으로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그 동작—은 바로 그 정보 막 위를 스치며 파동을 새겨 넣던 최초의 양자적 진동을 상징하는 듯하다. 첫째 날, 광자가 자유롭게 풀려나며 ‘빛’이 개방되는 순간, 우주는 처음으로 《시간과 공간의 축을 세울 기준 속도(빛의 속도)》를 갖게 되고, 그 이전까지 평평한 2차원의 정보막은 둘째 날에 이르러 서서히 구형으로 부풀어 오른다. 그 둥근 정보막 위에 새겨져 있던 원초적 파동무늬들은 3차원 공간에 투사되면서, 오늘 우리가 보는 우주 그물망의 첫 패턴—은하가 필라멘트를 따라 배열되는 거대한 3D 구조—로 드러나게 된다. 결국 우리가 보는 우주의 형태는 단순한 물질의 뭉침이 아니라, 《초기 정보막에 기록된 진동의 흔적이 3D 공간으로 번역된 우주의 첫 ‘구조적 문장’》인 셈이다.
실제로 관측 결과, CMB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온도 요동》은 초기 우주의 ‘씨앗’ 역할을 했고, 이러한 요동이 중력에 의해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우주의 초기 폭발과 초신성 활동, 그리고 암흑물질 필라멘트 관측은 우리가 보는 3차원 구조가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뒷받침한다.
둘째 날, 구형 정보막이 서고 우주가 두 층으로 나뉘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구획되는 장면. 이 사건은 단순한 신화적 서사가 아니라, 《우주가 자신을 둘로 나누어 드러내며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 순간》에 대한 고대의 언어적 기록과, 현대 과학의 사실이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