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장모님 생신 날이었다.
딸 셋, 아들 하나, 사위들과 손주들까지 모이니 거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한 집에 열댓 명이 모이면 그 자체로 축제다. 누군가는 꽃다발을 들고 왔고, 누군가는 장바구니처럼 크고 반짝이는 쇼핑백을 안고 들어섰다. 거실 테이블 위엔 순금 반지, 목걸이, 팔찌, 귀걸이가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우와~” 감탄이 터졌다. 거실은 어느새 금은방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머니를 모시고 대식구가 금은방에 단체로 입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제들끼리는 이런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이 반지, 나중에 결국 내가 다시 가져가는 거 아냐?”
“그렇지~ 엄마 돌아가시면 자기가 선물한 거 자기가 가져가~ 투자야~”
예의 없고 시답잖은 농담이지만, 불쾌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말들이 정겨웠다. 우리 처가 식구들은 벽도 없고, 허물도 없다. 누가 뭘 해도 다 웃고 넘긴다. 눈치 보다 정이 먼저 움직이는 집안.
그 안에서 나도 이제 웃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가장 기억에 남은 선물은 금도 아니고, 보석도 아니었다. 막내 처남의 아내,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막내 동생처럼 생각하는 처남댁이 내놓은 선물은 예상 밖의 물건이었다. 하얀 프레임에 검은 화면이 달린 디지털 액자. 번쩍이는 장신구들 사이에서 혼자만 담백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 기계.
모두가 조금 갸우뚱했지만, 나는 그게 왠지 정이 갔다. 내가 지루할 만큼 긴 우주 이야기를 꺼낼 때도 항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주는… 그런 사람답달까...
차가운 디지털 기기가 이리도 훈훈할 줄이야. USB를 꽂고 전원을 켜자, 첫 화면에 낯익은 사진이 떴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나란히 앉아 생활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아, 이 사진!”
다들 익숙한 사진이었다. 장인어른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 가족 모임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 까지도 사실 별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생각지도 못한 액자선물에 처남댁의 마음이 참 따뜻하다고 생각한 정도.
나는 무심히 다음 나올 사진을 기다리다가 이상한 걸 느꼈다. 장인어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깜빡인 것이다.
“어...? 뭐지?”
이내 장인어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모님을 바라보더니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았다. 장모님도 환하게 웃으며 안겼다. 정지되어 있던 사진이 영상으로, 기억이 현재로 살아났다.
거실이 일순간 정지된 듯 고요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화면을 바라봤다.
장모님은 입을 막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셨다. 아내도, 처제들도, 아이들까지 조용히 눈가를 훔쳤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 괜찮다’ 되뇌었지만, 괜찮지 않았다. 울컥하는 감정이 멈추지 않았고,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
그 순간의 눈물은 AI가 편집한 이 움직이는 사진이 우리를 속였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마치, 아주 먼 길을 떠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라 믿었던 그분이, 아무런 예고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 앞에서 미소를 지은 순간 같았다. 그분의 미소는 너무도 익숙했고, 포옹하는 손짓은 살아 있을 때처럼 따뜻했다. 그날 장인어른은 정말 다시 집으로 돌아오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감동은, 몇 초 만에 모두의 마음을 꿰뚫었다. 정보였을지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존재' 그 자체였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과 의식이 그것을 생명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존재는 되살아났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는, 우주의 0.00000005%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존했다고 믿었던 장인어른의 육체를 제외한 99.9999995%는 여전히 이 우주 어딘가에서, 혹은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의 장 어딘가에서 살아 계신 건 아닐까. 그분은 떠났지만, 정보는 남았고, 그 정보가 의식과 만나는 순간, 존재는 다시 깨어난다.
정보만으로는 존재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존재는 기억 속에서, 감정 속에서, 눈물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결국 존재란, 우주와 나, 정보와 의식이 만나는 그 ‘사이’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브런치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 것을 다시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브런치와 함께 이루고자 하는 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몇몇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고... 닦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