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친구 여섯 명(햄버거)

여름정식

by Gourmet

저녁 영화와 햄버거는 단언컨대 완벽한 여름정식이다.


그날 아침, 실수로 선배한테 혼났다. 속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열이 났다. 얼음을 씹어 삼켜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자책감과 억울함이 뒤섞여 하루 종일 가라앉아 있었다.

사건은 전날 저녁부터 시작됐다. 친구들과 샤부샤부를 먹다가 근황 토크가 나왔다. 한 친구가 가족들과 [F1 더 무비]를 보고 왔다고 했다. F1 경기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이해가 잘 되고 감동적이었다는 평이었다. 채소와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나누는 가벼운 이야기였다.

다음 날, 화장실에서 반달 언니를 만났다. 평소 나를 살갑게 대해주는 대학원생 언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F1 선수들을 덕질하고, 더운 여름에도 꼬박꼬박 경기를 보러 가는 언니였다. 어제 친구가 해준 영화 이야기가 생각나서 안부 인사처럼 물었다.

"언니, 그 영화 봤어요? 재밌대요."

언니는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며 F1에 관심 있냐고, 정말 잘 만들었다고 감탄을 쏟아냈다.

"2회 차 보러 갈 건데, 내일 같이 볼래?"

시끄러운 영화는 별로였고, 애니메이션 말고는 영화를 잘 안 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반달 언니와 단둘이 약속이 생긴 건 처음이라 수락했다.

하교 시간엔 차가 막히기 때문에 15분 일찍 학교를 나섰다. 언니의 SUV에 올라탄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막 지고 있는 노을을 더 맑게 보려고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 상쾌했다.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다 보니 금세 영화관에 도착했다.

더워서 그런지 우리 둘 다 입맛이 없어서 표만 끊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기나긴 광고가 시작됐다. 그동안 언니는 소곤거리며 영화 정보를 알려줬다. 실제 F1 선수들이 출연해서 현장감이 장난 아니라고, 구도를 시야각에서 찍어 내가 차에 앉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눈이 반달처럼 접히며 열심히 설명하는 언니에게서 은은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반짝임.

영화는 재미있었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속도감, 꼴등에서 1등이 되는 영웅 신화. 하지만 나에게 큰 울림을 준 건 주인공의 영웅담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차를 수리하는 엔지니어 팀에 한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은 타이어를 교체할 때 수리 도구가 걸리는 실수를 두 번 했다. 젊은 주인공 조슈아에게 비아냥을 들었다.

그날 아침, 나도 그 직원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실수를 했고, 혼났고, 자책했다.

작중 다른 주인공 소니가 그 직원에게 해주는 위로가 나에게 해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반달 언니는 F1 경기 재현에, 나는 얼떨결에 받은 위로에 감동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2시간이 지나 정말 새까매진 밤. 우리 배도 텅 비었다. 근처 맥도날드로 향했다.

"같이 봐줘서 고마워. 내가 살게."

반달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불고기 버거와 생수를, 언니는 치킨버거에 코우슬로를 시켰다.

"그거로 배 차? 더 시킬까?"

불고기 버거는 사이즈가 작았다. 하지만 여름 저녁에는 많이 먹으면 잠이 안 와서 손사래를 쳤다.

천천히 먹는 게 다이어트에 좋다길래 감사한 마음으로 햄버거를 꼭꼭 씹었다.

불고기 소스가 뿌려진 패티는 달콤하면서도 짭조름했다. 간장 베이스에 설탕이 녹아든 그 특유의 단짠 조화. 패티를 씹으면 고기 결 사이로 소스가 배어나왔다. 아삭아삭 씹히는 양상추는 시원했다. 수분이 가득한 채소가 입안을 정리해줬다. 콜라 대신 마시는 생수로 여름의 갈증을 날렸다.

음식을 먹는 게 내가 더 빨랐다. 언니는 코우슬로를 먹어보라고 권했다.

코우슬로는 적당한 간과 고소한 마요네즈로 버무려져 있었다. 양배추는 가늘게 채 썰려 마요네즈 드레싱에 골고루 코팅됐다. 한 입 먹자 아삭한 식감과 함께 고소함이 퍼졌다. 땀으로 빠진 염분이 보충되는 것 같았다. 차가운 양배추가 입안을 식혀줬다. 몸의 온도가 1도 내려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햄버거는 단언컨대 완전식품이다. 탄수화물, 단백질, 채소가 한 손에 들어온다. 단 몇 분 만에 완성되지만 배를 채우고 마음을 위로한다.

"갈 때까지 덥네."

반달 언니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차로 나를 데려다줬다. F1 더 무비의 OST를 틀었다. 쿠키 영상 속 주인공이 사막을 달리던 모습에서 느꼈던 여운이 집에 가는 길까지 이어졌다.

오늘의 기분은 마치 여름날 같았다. 낮은 무엇이든 말려 죽일 것 같은 열기로 뜨거웠고, 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선선했다. 아침엔 속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열이 나고 아팠는데, 저녁의 영화와 햄버거로 이렇게까지 온도가 떨어지고 행복해졌다. 사람의 기분이란 이렇게 단순하다는 사실이 어이없기도 하고, 나에게 이런 순간을 선물해 준 반달 언니에게 무척 고마웠다.

여름의 낭만이라고 하면 흔히 푸르른 나무, 시원한 수박, 바다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에게 여름정식은 지극히 도시적이다. 저녁 영화와 패스트푸드.


내년 여름이 되면 이 순간이 다시 필름처럼 상영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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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타? 한 입 잡솨보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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